딤후 2장 강해(8-13)
앞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 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말했습니다.
먼저는 군사 같은 사람입니다.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내 사생활에 매여 살면 안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경기하는 선수처럼 룰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룰은 말씀입니다. 충성 된 사람은 철저히 말씀의 기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기준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충성 된 사람은 수고하는 농부 같은 사람입니다. 농부의 특징은 성 실, 땀, 노력입니다. 우리는 성실한 농부처럼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내가 이런 충성 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이렇게 충성 된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충성 된 사람이 충성 된 사람을 만듭니다. 내가 충성되지 못하면 내 주변 사람들도 충성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충성 된 일꾼이 되고 내 주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충성 된 사람인지 살피고, 또 그들을 충성 된 일꾼으로 키워내는 사람들이 됩시다.
충성 된 일꾼의 표상은 예수님이십니다. 바울도 예수님에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충성 된 일꾼은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군사로, 경기하는 자로, 농부로 사신 사역자의 모든 모습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충성 된 사람이 될 겁니다.
1. 복음적인 가치관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서신을 통해서 말해 주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복음적인 가치관입니다. 사람은 생각 혹은 가치관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생각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다고 하지만 가치관이 복음적인 가치관으로 바뀌지 않은 채 일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의 모습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적인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들이 바로 그런 복음적인 가치관입니다.
8절,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1)다윗의 후손이고 2)죽은 자들 가운에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이것이 바울이 늘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런데 왕이신 그분이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왕이신 주님이 우리 위해서 낮아지셨다. 겸손히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도 주님처럼 낮아지자. 또 그분은 우리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다.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당하자.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각오하자.
주님은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다. 주님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절망도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절망을 정복하는 능력이 주님에게 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고난이 있고 또 죽음이 있다 해도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마지막 한 판이 남아 있다. 그건 부활이다. 여러분이 겪고 있는 지금의 어려움과 고난이 끝이 아니다. 그 다음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성도는 어려움 때문에 절망해서는 안 된다. 부활신앙이 있어야 한다. 죽음에서 부활하듯이 오뚝이처럼 다시 벌떡 일어서야 한다.
고난을 통과해야 부활의 영광이 있다. 고난 없이 영광 없다. 오늘의 고난을 잘 이기면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라.
9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수시로 매였다. 죄인으로 체포되어서 꼼짝 못했다. 참 고달픈 삶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복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핍박을 한다.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멀쩡한 우리가 세상에서 죄인취급을 받고, 가정에서도 나쁜 죄인처럼 취급을 받기도 하고, 실제로 핍박 받는 나라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인으로 투옥되기도 한다.
복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결코 편안한 삶이 아니다. 우리는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내가 고난을 피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지만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당당해야 하고, 기꺼이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가 고난 없이 예수를 믿으려 할 때 신앙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고난을 각오해야 첫째는 내 신앙을 지킬 수 있다. 고난이 두려운 사람은 예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고난을 각오한다.
우리가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다. 내가 고난을 각오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어야 나를 통해서 아직 믿지 않은 가족과 이웃을 구원할 수 있지 않겠나?
나도 핍박 받으면서 예수를 믿었는데, 그 핍박에 굴복했다면 나도 문제지만 우리 가정도 구원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라도 고난을 각오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기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매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은 아무리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핍박하고 가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묶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묶을 수 없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래서 핍박하면 할수록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중국 같은 곳에서는 공산주의사회가 되면서 선교사를 다 추방하고 성경을 다 불태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갈수록 더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철장도, 어떤 사상도 복음을 맬 수 없었다. 북한에서도 복음은 살아 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 자신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했다. 자기를 감시하는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죄수로 재판을 받을 때도 재판하는 왕에게 복음을 전했다. 복음은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환경이 어려울 때 복음은 더욱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여러분 중에 힘들게 예수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힘든 것이 핑계가 될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핍박 속에서도 자기의 신앙을 지켜내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구원시켰다.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다. 여러분이 고난 속에서도 여러분의 가족을 구원시키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런 고난을 참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택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군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정말 택함 받은 사람들, 마음이 준비가 된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겁니다.
구원시키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고는 우리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VIP를 만나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반드시 준비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열심히 섬기는 겁니다.
2. 복음적인 가치관의 연장선에서 바울의 확신
11절을 보면 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뜻은 <여기 믿을만한 말이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믿을 만한 말입니까? 11-13절까지 내용입니다. 어떤 말들입니까?
11절,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면 주와 함께 살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뭡니까?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겁니다. 심지어 주님 때문에 순교도 하는 겁니다. 예수를 잘 믿다가 죽는 겁니다. 이런 것이 주와 함께 죽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믿는 것이 뭡니까?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겁니다.
주와 함께 산다는 것은 뭡니까?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겁니다. 주님과 내가 한 가족이 되어서 영원히 산다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는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가족들에게 혹은 세상에게 버림받았다 해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고 천국으로 영접하신다는 겁니다.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예수와 함께 죽고, 살아도 예수와 함께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딱 달라붙어야 합니다. 결코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12절,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
참는 것은 현재를 말합니다. 현재는 내가 참아야할 일이 많습니다. 고난도 참고, 비난도 참고, 눈물도 참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합니다. 현재는 고난이지만 미래는 영광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기 바랍니다. 이 소망을 가지기 바랍니다.
2)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이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되고, 신앙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주님이 부끄러워서 안 믿는 척 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 지금 잠시 어렵다고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은 잠시 잠간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삶은 영원합니다. 지금의 편안함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리에서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주님을 드러내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도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13절,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결 같지 못하고 때로는 실수합니다. 때로는 넘어집니다. 때로는 죄를 짓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언제나 믿을만합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신뢰할만합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기에 반드시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사는 자들에게 보상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 결 론 >
오늘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정신과 가치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행동도 다를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와도 바른 반응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특별히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만큼 여러분의 신앙 환경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만큼 여러분 주변에 믿는 사람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은 여러분의 사명이 크다는 겁니다. 누군가 처음 믿는 사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썩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핍박을 각오해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위에서 가족구원의 열매가 맺힙니다. 여러분이 중요하고 여러분이 할 일이 많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더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가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특별히 오늘 배운 것처럼 성경적인 원리를 꼭 마음에 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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