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15-18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고난도 기꺼이 각오해야 한다고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라는 것이 적어도 바울에게는 막연한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고난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 중에 하나는 인간적인 배신입니다.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것처럼 특히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처럼 큰 고통을 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그런 고통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1. 바울을 버린 사람들(15)
1)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다고 했는데, 어떤 상황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소아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로마 제국의 한 도(道)였습니다. 에베소가 그 도의 수도였습니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3년 이상 머물렀기 때문에(행 20:31) 아시아에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 중에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자기가 세운 교회들도 있었을 겁니다. 특히 그 중에는 자기가 직접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세운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바울이 그들에게는 영적인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고 했는데 여기서 버렸다는 의미는 이들이 복음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재판을 받고 또 체포되어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할 때 자기와 각별한 관계를 가지던 아시아의 성도들이 자기를 돌보지 않은 겁니다. 나 몰라라 한 겁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성도들이 더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고, 도움을 주면 좋을 텐데, 나 몰라라 해 버리니 그게 굉장히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다고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섭섭했으면 그랬을까요?
그 중에 특히 두 사람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부겔로와 허모게네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들이 바울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준 것 같습니다. <바울을 돕는 일에 우리가 나서지 말자> 이런 결정을 하는데 주도적으로 간여를 한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해 보니까 목사님들이 이 서운함 감정, 섭섭한 감정을 잘 가집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사실 성도들만 바라보고 목회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맡겨주신 양무리들만 바라보고 목회합니다. 그리고 평생 양무리를 위해서 자기 힘을 다 쏟아냅니다. 그러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서운한 감정을 가지기 쉬운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당신들을 위해서 평생 헌신했는데 당신들이 나에게 이럴 수 있나?>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겁니다.
바울은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습니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정작 바울이 가장 힘들 때는 모른 체 해버리니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이런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서로 간에 이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조금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좋을 때는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울 때입니다. 목회자도 몸과 마음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울 때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조금 더 배려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좋을 때보다도 어려울 때가 언제인지를 잘 살피면서 그럴 때일수록 더 사랑과 관심을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2. 신실한 사람(16-18)
그런데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신실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 오네시보로 같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자주 바울을 격려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인간적으로 굉장히 외롭고 힘든 시절입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요? 위로와 격려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처지가 되면 어떻습니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도 서서히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형편이 좋을 때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어려워지면 이상하게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갑니다. 바울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개척하고 전도했던 사람들조차도 등을 돌려버립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낙심이 됩니다. 그래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누가 바울을 찾아옵니까?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바울을 찾아와서는 격려해 주었습니다.
17절을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부지런히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에베소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멀리 로마까지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인데도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교통편도 원활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로마까지 찾아가서 바울을 격려한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사랑과 관심이 있으면 거리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2)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16).
감옥에 갇힌 사람, 죄수로 낙인찍힌 사람을 찾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나를 찾아오기를 꺼려하고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는 마당에 이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바울을 찾아와서는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울에게는 너무 고마운 일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어려울 때,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을 때, 찾아와주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3) 18절을 보면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도 봉사를 잘 한 사람입니다.
원래 잘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머물 때도 이 사람이 바울을 잘 도왔던 모양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도 여러분의 주변에 이런 친구, 이런 성도, 이런 이웃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 친구를 둘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격려의 사람, 위로와 사랑의 사람이 되십시요. 그래서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여러분 때문에 행복하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3. 그 날을 기억하고 살자.
18절을 보면 바울이 오네시보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의미 있는 언급을 합니다. 그것은 <원하건대 주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일종의 기도입니다.
여기서 저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 날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그 날이 언제입니까? 주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주님이 오시는 날이 아니라 그 날이 바로 세상 끝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날입니다. 내 삶이 정말 올바른 삶인지 아닌지는 그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 날에 <오네시보로> 같은 신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당한 평가를 받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늘 기억해야할 날이 바로 그 날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입니다. 그 날이 되어야 진짜 내 삶이 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에 주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준비를 하고 삽니까? 주님이 보실 때 잘했다 칭찬 받을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 순간을 살기보다 그 날을 준비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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