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1장 강해(3)(딤후 1:9-14)
우리는 지난주에 바울이 훌륭한 많은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두려워하고 있는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지를 살펴보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적인 요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속에 허락하신 그 은사를 다시금 불일듯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능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되가 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가?
1. 하나님의 구원 때문이다(9).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구원 받은 이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알아야 한다. 구원 사건은 우리 일생의 가장 크고 놀라운 사건인 줄 믿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를 9절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1) 거룩하신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가장 첫 번째 의미는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너는 내 것이라> 지명하여 불러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부름 받았다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의식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 바뀌었습니다. ‘슈틸리케’라는 독일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 대표팀 감독이 되어서 한 첫 번째 일은 대표로 뽑을 선수들은 살펴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이 실제로 뛰는 경기장을 많이 방문했습니다.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은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는 겁니다. 축구 국가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은 새로운 대표팀 감독에게 부름을 받기 위해서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다 부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영광을 누립니다. 이렇게 국가대표로 부름 받은 선수들은 자기가 국가대표로 부름 받았다는 강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부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 부름 받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부름입니까? 이 부름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설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르심은 그냥 부름이 아니라 소명이 있는 부르심입니다.(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여러분, 소명이 뭔지 아시죠? 사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부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았을 때는 이미 그 안에 소명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싸워서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한다는 굉장한 소명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아시안컵에서 특별히 결승전에서 우리 선수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다 보셨을 겁니다. 운동장에서 탈진해서 쓰러질 정도로 열심히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그 부름 안에서 그렇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너무나 분명한 소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국가대표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의 고귀한 소명을 모르고 삽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는지 그 목적을 모르고 삽니다. 그러니 구원은 받았는데 그 이후의 삶을 보면 국가대표처럼 치열한 자세, 열정적인 삶의 자세 없이 그냥 물에 물탄 듯이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분명한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 소명이 뭡니까?
‘거룩한 부르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겁니다. <거룩>이 뭡니까? <거룩>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 받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다르게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겁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다른 것이 없다면 이미 하나님이 아니듯이 우리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르지 않으면 맛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성도라고 해서 세상과 다른 것이 없다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과 자기가 다르지 않으려고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볼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가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를 안 냅니다. 숨기려고 합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다르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세상에 동화되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용기를 가지면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조롱을 받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에 영향력을 줄 것입니다. 우리부터라도 세상과 다른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2)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부정적 진술).
이것은 구원의 성격의 중요한 면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행위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내가 착하고 산다고 해서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 받지 못합니다. 내 행위로는 구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된 것입니다(긍정적 진술).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된 구원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우연히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구원 받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영원한 때 전부터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계획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실 계획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깊고 세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영원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해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시키려고 이미 계획을 다 세워놓으셨습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뭐라고 하나님이 왜 그렇게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우시고, 아들까지 희생하십니까?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깊이를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지 못합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삽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2.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이다(10).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친히 오셨습니다(10절). 오셔서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하실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말씀은 복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왜 복음이 복음입니까?
1) 복음이 생명과 썩지 아니하니 하실 것을 드러내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죄는 사람에게 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사망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 사망을 이기게 해 줍니다. 인간의 죄의 형벌로 가장 엄하게 받은 바로 그 사망을 이기게 해줍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은 죽지만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언젠가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으면 영원한 천국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패배와 좌절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삶으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사망이 물러갑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다(11-12).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복음이 이제는 바울과 같은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계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내셨지만 그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사역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 선포자(설교) 2) 사도로 3) 교사로(가르침) 세움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역을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귀한 일은 없습니다.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만드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전도자의 삶에는 당연히 고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전도자의 고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12). 복음이 만약 이런 것이라면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니까 어렵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때 약해집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는 기독교는 강하고 생명력이 있어서 그 시대를 변화시켰습니다. 고난 없이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각오해야하겠습니다.
< 결 론 >
결론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디모데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무슨 부탁일까요?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입니다. 그 일을 자기를 이어 받아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누가 그 바통을 이어야 합니까? 우리들입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탁한 그 일을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해집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 전했을 때 그 복음은 전해졌고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이 아름다운 복음 전하는 일을 이 시대에 잘 감당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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