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1:1-8
오늘부터 디모데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서신사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서신서는 바울이 기록한 마지막 서신입니다. 죽기 직전에 기록한 편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유언장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죽기 직전의 바울의 상황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이 서신은 개인서신입니다. 바울이 어떤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라 한 사람, 디모데에게 보낸 개인 편지입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바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라는 위치에서 보는 바울이 아니라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아버지로서의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서신입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마음이 참 여린 사람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그런 디모데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이 고생하는 자식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런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서 이 서신서를 썼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고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자기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을 살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내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고백을 늘 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다. 내 뜻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 내가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 내가 이렇게 큰뜻주님의교회 교인이 된 것, 내가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었다.
▰ 내가 이렇게 목자가 된 것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나는 목자가 되려고 의도한 적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목자로 세워주셨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된 일이다.
▰ 나도 내가 이렇게 목사로 살아가길 의도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뜻 가운데 이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고백 속에 이 고백이 있길 바란다.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서신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개인서신이다.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자녀가 없었는데 디모데를 자기의 자녀처럼 생각했다. 실제로 디모데도 바울을 영적인 아버지로 생각하고 평생을 함께 했다. 때로는 부모 자식처럼, 때로는 믿음의 동지처럼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평생을 달려온 것이다. 바울도 위대하지만 나는 디모데도 정말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디모데는 어릴 때 부모를 떠나 평생을 바울과 함께 했다. 바울을 따라다니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함께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만났다가 떠나도 이 사람만은 늘 그 자리를 지켰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도 이런 신실한 사람, 한결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은 밤낮으로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디모데다. 부모가 자식을 늘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하면서 생각해야할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디모데는 기도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 제일처음 드는 마음은 감사의 마음이었다. 디모데를 생각만 하면 감사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와 이렇게 주 안에서 만나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했을 것이고, 디모데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감사했을 것이고, 평생 곁에 두면서 지켜본 이 사람의 헌신적인 모습을 생각하면서 감사했을 것이고, 그의 수고를 생각하면서 감사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이런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한다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디모데는 마음이 참 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몸도 약한 사람이어서 여러 가지 병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목회를 하느라고 애를 많이 썼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그래서 아마도 많이 울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것을 아는 것이다. 힘들어서 운 것도 있지만 바울은 볼 때도 울고, 바울과 헤어질 때도 울고 아마도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눈물을 생각하면서 바울이 더 디모데를 보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디모데를 만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을 부모가 간절히 보기 원하고 실제로 봤을 때 그렇게 기뻐하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서 산다고 애쓰는 디모데를 빨리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도 서로 만나면 기쁨을 주는 관계가 되길 바란다.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이 또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생각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다. 이 말 속에 디모데라는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바탕이 참 깨끗한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디모데가 이런 신앙인격을 가진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집안 내력을 보니까 이해가 된다. 디모데의 외할머니가 믿음이 좋았다. 참 신앙의 사람이었다. 이 신앙이 그대로 딸이요 디모데의 어머니인 유니게에게 이어졌고 디모데에게까지 그 신앙이 이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디모데는 뿌리 깊은 믿음의 가정에서 아주 훌륭한 믿음을 가진 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앙을 보고 배웠고 말씀으로 잘 훈련 받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질이 다른 것이다. 그 토양이 너무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뒤에도 나온다(딤후 3:13-15).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우리가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경건한 분위기에서 말씀을 잘 양육해야 될 줄 믿는다. 토양작업을 잘 해놓아야 한다. 그래야 커서도 빗나가지 않고 세상 아이들과 다른 아이들로 자랄 수 있다.
바울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좋은 바탕을 가지고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고 있고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서 다시 격려해 주고 싶었다.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 안수기도를 해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디모데 안에 참 귀한 은사가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자질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은사들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제대로 발휘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가 많이 위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불을 붙이고 싶다고 한 것은 디모데의 열정이, 은사가, 여러 가지 힘든 일 때문에 사르라지고, 냉랭해지고, 약해지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신앙생활을 잘 해보고 싶은데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계속 생기면 사람은 약해진다. 위축을 당한다. 특별히 목자들 같이 목양을 하는 사람은 일반 성도들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그게 심해지면 낙심하게 된다. 침체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한다. 내 안에 열정이 늘 불타오늘 수 있도록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하고 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자기 신앙이 약해지려고 하면 더 기도해야 하고, 더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하고 더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떤 이유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준 마음인가? 마귀가 주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면 시험에 들고, 믿음이 약해지고,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에 매여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
대신 능력을 주신다.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신다. 두려워말고 그럴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두 번째는 사랑을 주신다. 왜 사랑인가? 우리가 인생이 힘들면 사랑이 식어진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자꾸 자기연민에 싸인다. 자기만 보게 된다. 사람을 만나기도 싫어진다. 사랑은 따뜻한 것이고 열정인데 신앙이 약해지면 사랑이 식어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사랑을 받아야 한다.
셋째, 절제하는 마음을 주신다. 절제는 쉽게 말하면 자기관리다. 자기조절이다. 그런데 낙심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관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낙심한 사람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그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8절과 같이 살아야 한다.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주님을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한다. 두 번째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바울은 디모데가 죄수가 되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자기를 혹시나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갖지 말고 우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도 각오해야 한다. 어려움이 올수록 더 기도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신이 바로 복음과 함께 고난도 각오하겠다는 정신이다. 이런 뜨거운 믿음을 갖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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