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15)
선교사님과 영적교제(빌 4:10-20)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이 보내준 헌금에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자신에게 선교헌금을 보내 준 빌립보교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선교사님과 교회의 영적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울러 신앙 안에서 교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사역자가 기뻐하는 이유
10절을 보면 바울이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조금 과장해 보면 기뻐서 펄쩍뛰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받았을 때 너무 좋아서 기뻐 뛰는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아무런 꾸밈도 없이, 감추는 것도 없이 솔직히 자신의 기쁨을 드러내는 그런 모습입니다. 무엇이 이 노 사도의 마음을 그렇게 기쁘게 해줄까요? 알고 보면 별 것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생각하는 마음이 다시 생겼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10).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편지의 기록 목적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다름 아니라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선교후원을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빌립보교회가 바울에게 선교후원을 하다가 어떤 이유 때문에 중단이 되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다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선교후원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든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난다>고 했던 겁니다.
마치 잘 자라는 식물이 죽어서 없어진 것 같이 되었다가 어느 날 보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싹이 나기 시작한 겁니다. 살아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는 것 같은 신선한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의 마음이 이런 겁니다. 죽었던 식물에서 다시 싹이 나는 것 같은 신선한 기쁨이 이 노 사도를 흥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단지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교회가 자기를 완전히 잊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한 애정이 많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그의 사역을 막습니다. 자꾸 길이 막히는 겁니다. 왜 막힐까? 고민하고 있는데 꿈에 마게도냐인이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바울은 이걸 계기로 하나님께서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고 믿고 유럽 대륙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세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찬송하고 기도하다가 옥문이 열리고 모든 결박이 풀어지는 기적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걸 계기로 감옥을 지키는 간수장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빌립보 교회의 창립멤버가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수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이 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습니다. 이 교회도 바울을 사랑하면서 그의 선교사역을 후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후원이 중단이 된 것이죠. 바울은 후원이 끊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교회와의 교제가 단절되어 진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돈이란 것은 바울과 빌립보교회를 이어주는 통로였습니다. 돈 자체가 아니라 돈 안에 담긴 교회의 사랑과 정이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이어주는 파이프였던 것이죠.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위하여 선교헌금을 보낼 때마다 그를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런 관계가 중요했던 것이죠. 근데 이상하죠. 이런 선교후원이 중단되면 점점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잊혀집니다. 이상하게 그렇게 됩니다. 바울도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다시 후원을 시작함으로 자신과 빌립보교회의 관계가 회복된 것 때문에 너무 기뻐하는 겁니다. 둘째, 빌립보 교회가 그래도 바울을 생각하고 있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그들이 바울을 여전히 생각하고 염려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마음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역자들이 가장 큰 아픔은 성도들이 사역자를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일 겁니다. 반대로 사역이 힘들어도 성도들이 사역자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힘들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사역자의 삶입니다. 특별히 선교사는 더 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 조국을 떠나 홀로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고독하겠습니까? 그래도 고국에서 교회가 자기를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느낄 때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여러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있는데, 그 후원이 중단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야 사정이 있어서 중단할 수 있겠지만 우리보다도 선교사님들이 받는 충격은 훨씬 큽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꾸준하게 선교 후원을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단지 기계적으로 돈만 보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기대하는 것은 단지 돈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관심, 사랑, 마음 그리고 기도가 함께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목장에서 후원하는 선교사님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목장별로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요즘 같으면 카톡을 통해서 서로의 소식을 나누고 기도를 나누는 그런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정말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동역이 꼭 필요합니다.
2. 신앙의 적응력, 유연성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꼭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신앙의 적응력과 유연성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꼭 습득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에 대해서 기뻐하면서 이것이 돈 때문이 아니라고 11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 빠져도 스스로 만족하는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습득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12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 바울은 극과 극의 상황에 빠져도 그 상황에 거뜬히 적응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해도 잘 살았습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없다고 괴로워하거나 불평하면서 고통하지 않았습니다. 배부를 때도 있었고 심지어는 먹지 못해서 굶을 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이 자기에게 닥쳐도 그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적응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디에 가도 잘 적응하는 사람은 무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적응을 못해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잠자리만 바뀌어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않아도 견디지를 못합니다. 은택이가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생소한 환경입니다. 모든 것이 어색할 겁니다. 그런데 군대생활을 잘 하려면 본인이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적응을 해야 합니다. 그게 살아남는 비결입니다.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탈영을 한다든지 따돌림을 당하든지 자살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적응을 해야 합니다. 은택이가 또 다음 달부터 혹한기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군인으로서 가장 극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살아남기 위한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극한 훈련을 받아놔야지 후에 그런 어려움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신앙도 이런 혹한기 적응훈련과 같은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을 때도 믿음으로 살고, 힘들 때도 믿음으로 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자일 때도 믿음으로 살고, 망해서 가난해져도 믿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된 믿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그런 적응훈련이 이미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있든 없든 그건 별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13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 능력은 알고 보니까 엄청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능력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편안한 삶, 잘되는 삶만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쫓겨나기도 합니다. 가난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병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가졌다면 그 어떤 상황에도 그 사람은 믿음으로 이겨 냅니다. 이것이 진정한 능력이지요. 우리가 이런 능력을 구해야 하고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근데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됩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된 것이 아니라 평생 훈련을 통해서 이런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유연성이라고 표현하려고 합니다. 신앙이 유연해야 합니다. 경직되어 있으면 적응하지 못하고 부러집니다. 운동을 할 때도 몸이 경직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꼭 부상을 당합니다. 그래서 운동하기 전에 반드시 몸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운동할 때도 힘을 빼야 합니다. 무리하게 힘을 주어 운동을 하면 다칩니다. 그래서 잘 하는 사람은 몸을 유연하게 움직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이런 유연성 있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남편이 힘들게 해도 휘둘리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겁니다. 그 상황에 적응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도 안절부절 하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겁니다. 적응해 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이 기복 없이 견고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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