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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11)
임호남 2014-12-24 추천 0 댓글 0 조회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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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신앙(빌립보서 3:9-16) 2014수요

 

빌립보서를 통해서 믿음의 사람 바울의 신앙을 배울 기회를 갖고 있다. 저는 다른 신앙의 사람들보다 바울의 신앙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배우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처음부터 믿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믿음을 갖고 살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는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예수님을 어설프게 알고 어설프게 믿는 신앙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는 신앙인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의 과연 어느 정도까지 바뀔 수 있을까? 또 어떻게 바뀌는 것이 바른 것일까? 바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의 신앙을 공부하려고 한다.

 

1.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된 나

지난주에 배웠던 것처럼 바울이 열망하던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9절). 이게 무슨 말일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된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었어?” “내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었어?” 이런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전에 내가 알던 내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나를 내가 발견하는 것이다. 어디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모두도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여러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을 발견하길 바란다.

 

1)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자신은 어떤 것일까?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모습이 9절에 나온다.

 

*과거의 바울 : 율법으로 의롭게 된 바울

*지금의 바울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로 의롭게 된 바울.

이것이 과거의 현재의 바울은 가장 잘 보여준다.

 

과거에 바울은 어떻게 살았을까?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살았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삶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삶을 말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힘쓰다보면 내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가 드러난다. 자신의 자랑거리가 생긴다.

 

또 율법을 좇아가다보면 성취감과 절망감을 동시에 경험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정도 성취감을 느낀다. 내가 이만큼 했다는 보람도 느낀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서 절망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노력하면 할수록 내 힘으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서 끊임없이 달려가야 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될 것 같은데 안 되는, 잡힐 것 같은데 잡히는 않는 그 무엇을 위해서 평생 몸부림치다가 절망 가운데 끝나는 인생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인생이다. 그래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롤로코스트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 조금 노력하면 뭔가 내가 성취했다는 성취감을 느끼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절망하게 된다. 성취감과 절망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을 가졌던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인생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확 바뀌어 버린다. 왜 혁명적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로운 삶의 핵심은 이것이다. 내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누가 다 했나? 예수님이 다 하셨다. 그분이 율법을 다 성취하셨다. 그분이 내 죄의 값을 다 지불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죄를 덮어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내 인격과 생활을 보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보지 않고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보면서 그 주님 때문에 나를 의롭다고 간주해주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믿는 것뿐이다. 너무나 쉽다. 힘들지 않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배운 사람도 할 수 있고 배우지 못한 사람도 할 수 있다. 어른도 할 수 있고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인류의 기쁜 소식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누구를 자랑하게 되겠나?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이다.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찬양하고 전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 때도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게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그런 나를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자신을 예수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럴 때 천지개벽의 체험을 하게 된다. 영적으로 눈이 열리게 된다. 신앙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 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믿는 생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드러내는 생활, ‘좋았다, 나빴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생활이 아니라 부족해도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생활, 우리는 이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 더 알아가는 신앙

여러분, 이 정도 깨달았다면 굉장한 깨달음 아닙니까? 제대로 복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바울의 신앙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사람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신앙이라는 겁니다.

 

나는 이 정도 알고 있다. 나는 이 정도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만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은 끊임없이 더 알기 원했고 더 성장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이런 사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노력하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계속해서 노력하는 신앙, 성장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바울이 더 알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10).

 

-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했다.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더 알기 원합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도 나와야 한다. 주님을 더 알고 싶은 갈증이 있어야 한다.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세상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 것을 갖지 못해서 생기는 목마름이나 갈증이 아니라 주님을 더 알고 싶은 영적 목마름과 갈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을 더 알아가게 될 때 얻는 기쁨은 타는 갈증으로 목마른 내 목을 생수로 축이는 것과 같고, 보화를 발견한 것과 같다. 이런 영적 갈증이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 갈증이 생기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누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괜히 나도 먹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 성도들 중에서 주님을 더 알아가는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생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생겨서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아야 내 속에서도 그런 신앙을 사모하는 열정이 생기는 겁니다. 도전과 자극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서로서로 도토리 키 재기 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수준에서 만족하는 신앙이 됩니다. 결국 영적 성숙과 발전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 영적인 도전과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저도 신앙이 계속 성장한 데에는 이런 요인이 컸습니다. 저 주변에 제가 본받고 싶은 믿음의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가 목마름이 있으니까 찾아다녔습니다. 또 그런 분들을 만나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목마름이 있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했다.

주님이 죽으셨다가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아나셨는데, 죽음을 정복한 그 능력이 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자기도 그런 부활의 권능을 갖고 싶었습니다. 모든 절망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그런 십자가의 고난과 같은 고난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신이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받았던 그런 고난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신 주님이 고난 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싶었습니다. 어떤 형태로서든지 주님이 받으셨던 고난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생을 하고 싶고 고통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간접적이라도 주님이 나를 위해서 고난 받으신 것이 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입니다. 이미 훌륭한 신앙인이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더 알고 싶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큰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성장하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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