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30) 2014수요 부름받아, 환난과,
7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뜻은 거기에 걸맞게 살라는 겁니다. “~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육사생도는 육사 생도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육사생도는 육사생도로서의 명예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육사생도가 생도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엄격한 벌이 주어집니다. 합당하게 살지 않았다는 겁니다.
복음을 받았으면 거기에 맞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까? 복음에 맞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것이 너무나 귀하다면 내 삶 속에 그 귀한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믿는 것과 생활이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육사생도보다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더 철저하게 천국시민답게 생활해야 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삶이 없다면, 그런 신앙을 예수님이 어떻게 결론내립니까? 마태 7장에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보기는 좋습니다. 낭만적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바람이 불면 무너지고 맙니다. 삶이 없는 신앙은 이렇게 허약한 신앙,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신앙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철저하게 믿는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천국시민다운 생활인가?
1.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마음과 한뜻으로 협력하는 생활(27).
한마음과 한뜻이란 말은 같은 정신,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가 되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 할 때 왜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라고 했을까요?
염려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외견상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에 많이 침입했던 이단의 문제가 이 교회에는 없습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아주 평안해 보입니다. 그러나 겉보기엔 평안해 보여도 속에서 문제가 생길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내적인 힘을 분산시키는 원인들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내적인 분열 - 서로 분파를 이루어 싸운다.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편이 갈라지는데 보통 보면 장로파가 있다. 그 다음에는 목사를 지지하는 목사파, 그렇지 않으면 여기도 저기도 싫다 해서 중도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는 어느 파도 아니고‘예수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근히 서로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힘이 없습니다.
b. 느슨한 연합 - 같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깊은 사랑이 없습니다.
형식적인 관계는 가지만 적극적인 관심이 없다. 주일날 만나면 서로 웃으면서 인사는 합니다만 그 이상은 없습니다. 나도 상대방의 삶에 깊이 관여할 생각이 없고 상대방도 내 생활에 깊이 관여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적당히 서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가 유지하자는 겁니다.
c. 목적 없는 삶 - 교회가 평안하지만 목적이 없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의식이 없다. 거룩한 목표가 없으니 생동감이 없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어떻게 될까? 더 빨리 간다. 어떻게요? 힘을 한 곳으로 모아주면 배는 더 빨리 간다. 조정경기를 보면 모든 대원들이 일사분란하게 노를 저으니까 쏜살같이 배가 나가지 않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힘을 한 곳에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한 뜻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권면을 합니다. 무엇 때문에요?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한 마음과 한 뜻이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삶에서도 배웠습니다만 교회생활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감정과 기분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감정과 기분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니까 어떤 어려움을 겪습니까? 소위 말하는 시험에 수시로 빠지는 겁니다. 툭하면 상처 받았다, 시험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생활이 맨 날 어렵습니다. 맨 날 갈등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감정과 기분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사역입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는 내 기분, 감정, 이해관계를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고 교회가 교회다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거꾸로 갑니다. 왜 교회가 맨날 싸웁니까? 사역을 생각하지 않고 맨 날 자기감정, 자기 생각, 기분 따라 신앙생활을 하니까 서로 시기하고, 상처받고 상처 주고, 속상하고...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무엇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까?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내 생각도 내려놓고, 내 기분과 감정도 내려놓고 한마음이 되어서 협력하는 겁니다. 우리는 서로 다 다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같습니다. 주님의 뜻은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보고 달려가야지 맨 날 나하고 다른 점, 나하고 다른 생각 그것만 따지면 결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명분이다. 과연 그 일이 가치 있는 일인가? 힘들더라도 올바른 일인가? 이런 명분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비록 힘이 들어도 명분이 분명하면 사람들은 그 일을 하려고 한다.
요즘 군대가 사고로 많이 나고 어수선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어렵다는 전방(GP. GOP)에 근무할 우수병사를 모집하는데 경쟁률이 7.8:1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에 헌신한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하나 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교회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명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로운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27절 끝).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런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삶
이 복음을 위해서 살다보면 어려움도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대로 살려고 하는데 반대가 있다는 겁니다. 핍박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복음 때문에 오는 고난, 힘든 것,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특권입니다. 그러나 그 특권 안에는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몸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다. 창자국, 못자국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위해서 받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같은 죄인이 나의 주요, 왕이신 그분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는 것, 고난 받을 수 있다는 것, 영광이 아닙니까? 그분은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에 흔적을 가졌는데 나는 그분을 위해서 내 몸에 무슨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까?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그 몸에 흔적을 가지면서 주님을 믿는데 우리는 아무런 상처하나 받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 편하게만 신앙생활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난도 받으십시오. 불편도, 욕도, 희생도 감수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에 걸맞는 생활입니다.
< 결 론 >
우리는 교회는 복음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복음을 위하여 한마음 한뜻이 되자.
2) 복음을 위하여 서로 협력을 하자.
3) 복음을 위하여 수고를 각오하자.
그래서 주님이 귀하게 쓰시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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