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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5)
임호남 2014-11-12 추천 0 댓글 0 조회 194

 

간절히 원하는 것(빌립보서 1:20-26)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마음이 짠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간절하게 민족통일을 염원하는지 노래의 가사 안에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1. 사람들마다 간절히 이뤄지길 원하는 소원이 있을 겁니다.

1) 이념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념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합니다. 실제로 운동권 출신 학생들은 이념을 위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도 노동자로 취업해서 밑바닥 생활을 합니다. 가족도 포기하고 이념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때로는 자기 몸을 불태우기도 합니다.

 

 

2) 기업을 하는 사람은 자나 깨나 회사가 잘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잘 될 수 있을지 불철주야 고민합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주는 <내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코카콜라인 겁니다.

 

3) 목자들은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까?

큰뜻주님의교회 목자라면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오직 영혼구원과 제자 만들기를 간절히 원합니다>라는 답이 나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인데, 그 소원이 바로 영혼구원과 제자 만들기입니다.

 

4) 그렇다면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20절에 나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의 간절한 기대, 소망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겁니다. 여러분,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간절히 원한다는 겁니다.

 

바울은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아니 잠을 자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무의식의 세계와 의식세계, 그의 심장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는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단 1분을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를 제대로 만나버렸습니다. 예수 없이 살던 그가, 심지어 예수를 대적하던 그가, 어느 날 길에서 살아계신 그분을 뜨겁게 만나버립니다. 그 때부터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소망, 살아가는 이유, 능력, 인생의 해답, 기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눈에는 예수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분만을 위해서 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20절을 보면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수만 있다면 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높아질 수 있다면 자기의 체면이 구겨지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모욕을 당해도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뭡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견디지 못합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면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체면, 명예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람들은 반대로 삽니다. 자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되느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예수입니다(나의 기쁨 나의 소망).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20절은 심지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높아질 수만 있다면 나는 살아도 좋고, 심지어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문제로 발보등칩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보려고,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비굴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신앙의 양심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속삭입니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포기해, 타협해, 그것이 처세술이야!>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살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합니다.

 

그런데 진짜 예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삽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를 합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담대히 죽음의 길로 갑니다.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높아지느냐 아니냐, 이것이 최고 관심사였던 겁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자식의 성공입니까? 출세입니까? 부자 되는 것입니까? 재밌게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주님의 영광이 소원이 되길 바랍니다.

 

2. 어떻게 이런 삶을 사는가?

앞에서 바울은 예수를 제대로, 뜨겁게 만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됩니까? 다 바울처럼 뜨거운 만남을 가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바울인 21절에서 자세하게 소개를 해 줍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자기에게 사는 것이 누구라고 말합니까?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누가 삽니까? 내가 삽니까? 주님이 삽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질을 좌우할 질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사시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십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주님이 내 안에서 살 수 없습니다. 왜 일까요? 한 사람에게 두 주인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나라에 통치자가 두 명 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라가 더 혼란에 빠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둘 일 수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거나 주님이 주인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시려면 내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았기 때문에(갈 2:20) 주님이 그 안에 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안에는 누가 삽니까? 내가 삽니까? 주님이 삽니까?

여전히 내가 살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의 문제, 욕심, 자존심 때문에 갈등하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경험하지 못할 겁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는 놀라운 삶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기가 막히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내 안에 살게 되면 그 때부터 주님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위하여 살게 되고, 주님 뜻대로 사는 멋진 성도가 되는 겁니다.

 

3. 누구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우리들이 한 가지 더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첫째는 주님을 섬겨야 하고 둘째는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앙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의 영광이요

둘째는 빨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겁니다(23절). 참 신앙인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참 신앙인은 이 땅보다 천국을 더 좋아합니다. 자나 깨나 천국을 사모합니다. 왜냐하면 천국가면 그 때부터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주님을 빨리 만나 그분과 함께 살고 싶으니까요.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빨리 천국 가고 싶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뭘까요? 성도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영적 리더입니다. 좋은 리더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니까 아직도 세상에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는 겁니다. 그들을 보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그래서 빨리 천국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는 겁니다(23-24).

 

그래서 아직 죽을 수 없었고 가능하면 살아나가서 성도들을 돕고 그 결과 그들이 자기를 통해서 유익을 얻기 원했습니다(25-26).

 

- 25절,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 26절,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바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달랐습니다.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고,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이런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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