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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12)
임호남 2011-06-02 추천 0 댓글 0 조회 369

요일 4:13-21 2011수요

 앞 단락에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나?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모르면서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곧 지치고 말 것이다. 금방 탈진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가 우리 생활의 모든 가전기구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써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영적 발전소가 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거기에 대한 말씀이 13절이다.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잉 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을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상기시켜주셨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으면 그 이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그 약속은 언제 성취되었나?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다.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셨기에 대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성자 예수님이 떠나가시고 대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13절,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는 것이다.
13절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우리 삶에서 일어난 첫 번째 변화다.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는 성령님 곧 하나님 안에 거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실 수가 있게 되었다. 쉽게 풀어보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지만 그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실 뿐만 아니라 우주보다 크신 분이시다. 다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우리 안에 있지만 그분은 우리보다 훨씬 크신 분이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아무튼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은혜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받게 되었다. 사랑하는 관계, 친밀한 관계는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함께 있으면서 상대를 느끼고 늘 교제하는 일을 해야 가장 행복하고 든든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내 곁에,아니 내 안에 계신 너무나 가깝게 계신 분이 되셨고, 그래서 그분과 친밀하게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구약적인 개념으로 보면 굉장히 낯선 개념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위대하시고 그래서 가까이 하기에는 두려운 분이셨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친밀하게 느끼고 만나고 교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신앙생활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다른 점 하나가 더 있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적발전소가 뭔지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영적발전소인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수가 있을까?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모든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 힘으로는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지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한 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발전소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다. 이 발전소가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삶은 지치게 되고, 결국은 멈추게 된다.
내 힘만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지 말고 끊임없이 영적발전소가 돌아가도록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13절 마지막을 보면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그리스도인이라면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내 안에,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어떤 존재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당연히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라는 위대하고 크신 분이 내 안에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처음에 임신을 하면 한 동안은 그 사실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배가 불러오고 몸이 달라지기 때문에 내 몸 안에 생명이 잉태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당연히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있음을 알고 있나? 느끼고 있나?


 그렇다면 어떻게 알 수 있나? 몇 가지 증거들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성령께서 내 죄를 깨닫게 하신다(요 16:8).

그래서 성령이 지적해 주시는 내 죄 때문에 아픔을 가지고 눈물로 회개하고 자복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일이 있었나?


 둘째, 성령이 우리를 가르쳐주신다(요 16:12-15)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신다. 성경을 읽을 때 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신다. 마음눈을 열어주신다.


 셋째, 성령이 나를 인도하신다(롬 8:14)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넷째,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난다(갈 5:22-23).

다섯째, 성령의 권능들이 나타난다(행 1:8). 그 외에도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함, 확신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여러분 속에 있었나?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여러분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15절, 우리가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을 사는 방법이 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찾아오시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사람,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함께 사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했다면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신 것이다. 오늘 본문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이라는 표현이다. 16절에도 한 번 더 나온다.


 16절,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을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한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 안에 사는 것이 곧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다.


실제로 성도들의 삶이란 것이 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의지해서 기도하고 또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날마다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믿음의 삶이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도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17절, 이로써,

 이로써는 앞의 무엇을 받을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온전한 연합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연합의 관계의 기초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완전한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결국 무엇을 말해주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우리가 확신할 때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앞에 서게 될 날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담대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끔찍하게도 사랑하시고 나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면 우리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은총의 대상,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두려울 것이 없다. 그래서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운데 있다면 그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아버린다. 예를 들어서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에서도 내가 어떤 사랑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도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 사람이 나를 혹시 버리지는 않을까?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 지금의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 온전한 사랑의 관계에서 누리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감, 확신, 기쁨, 행복, 즐거움이다. 그런데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랑에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 그 사랑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적어도 이것은 알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분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 조건 없이 사랑하시고,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의 절대적 유익을 위해서 사랑하시고, 희생하시면서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믿으라. 받아들이라. 그 사랑 안에 머물라. 그러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19절,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사랑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나?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우리는 받아야 줄 수 있다. 받지 않고서는 줄 것도 없다. 기억하라.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을 받아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하셨네)


 20절, 앞에서 언급했지만 다시 한 번 언급한다.

 어떤 사람의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역으로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그 사랑을 나누면서 살 것이다. 그래서 형제 사랑이 중요하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것도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 생활도 결국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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