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4:7-12
누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물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바른 답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핵심도 결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7, 요한 사도는 성도들을 호칭할 때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한다. 요한의 마음속에 있는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랑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서로 미움의 대상이 아니다. 증오의 대상이 아니다. 갈등의 대상도 아니다. 서로 경쟁의 대상도 아니다. 서로 불편한 상대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모두 사랑의 대상들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혹시 불편한 사람이 있나? 미운 사람이 있나? 경쟁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그런 대상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들이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늘 마음에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생각해야 한다.
요한 사도는 노년에 입만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설교의 주제가 언제나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7절,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뭘 해야 하나? 우리는 제일 먼저 서로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역보다 일보다 중요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배의 자리에 앉기 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 내 인생의 첫 번째 일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일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다른 것은 우리가 비록 잘하지 못해도 만약 우리가 열심히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잘해도 예를 들어서 사역을 탁월하게 있고, 전도를 잘 하고 있고, 예배를 훌륭하게 드리고 있다 해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7절,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되 서로 사랑하자고 했다.
우리의 사랑의 특징은 서로 사랑이다. 서로 사랑의 반대는 뭘까? 자기만의 사랑, 자기만을 위한 사랑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인 사랑인 것이다. 상대방의 필요에는 전혀 관심 없는 자기중심적인 사랑인 것이다. 상대의 필요는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만 사랑하는 일방통행적인 사랑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늘 사랑의 대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늘 상대의 필요를 살펴야 한다. 내 만족을 구하지 말고 형제의 만족을 구해야 한다. 내 필요를 위해서 살지 말고 상대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혼자만 사랑하지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서로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치 우리 공동체는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
7절, 요한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은 이 사랑이 원래 우리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는 없는 그래서 하늘에서 수입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이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첫째는 먼저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사랑이 아니다. 남이 나를 먼저 사랑해주기를 기다린다. 네가 날 사랑하니 나도 널 사랑하겠다고 한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왜 널 사랑하냐?’라고 말한다. 먼저 사랑이 아니다.
둘째,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분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사랑하신다. 죄인임에도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다. 내 자식이니까 사랑한다. 내 남편이니까 사랑한다. 내 가족이니까 사랑한다. 이쁘니까 사랑한다. 내가 원하는 조건이 만족이 되니까 사랑한다.
셋째, 우리를 위한 사랑이다. 그분의 사랑은 자나 깨나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우리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잘 될 수 있다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다면 그분은 기꺼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넷째, 그분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희생을 치루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사랑,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낯선 사랑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온 사랑이다.
7절,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다. 이 하늘 사랑을 알지 못하던 우리가 사랑을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에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데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니까 그 하늘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거듭난 성도들 외에는 알 수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8절의 말씀이 성립 될 수 있는 것이다.
8절,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전부가 사랑이시다. 그래서 어디서 하나님을 바라보아도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닌 것이다.
9절,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나? 9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난 방식이고 이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셨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방식으로 나타나셨다. 독생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
이 세상이란 곳이 어떤 곳인가? 바로 死地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사지로 몰아내셨다. 왜 사지로 아들을 보내셨나? 그것이 바로 사랑이 나타난 이유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나? 영적으로 죽어있었고 또 영원한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바로 사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은 결코 그냥 보실 수가 없었다. 우리를 사지에서 건져내셔야 했다. 그 이유 때문에 대신 당신의 아들을 사지로 보내신 것이다. 우릴 살리겠다고 아들을 대신 죽음으로 내 모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릴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실 수가 있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이라고 내어주실 수 있는 희생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먼저 사랑, 우리를 위한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하나님의 결정의 동기다. 사랑하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행동의 동기도 사랑이 될 때 사랑의 행동이 나오게 된다. 의무감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이 나오게 된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아들 예수님도 아셨을까? 물론 아셨다.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실 때 그 길이 死地임을 알고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늘 십자가를 생각하고 계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가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꼭 닮으셨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도 친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가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를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이시다. (나 같은 죄인)
10절, 사랑은 여기 있다고 했다.
사랑은 어디에 있나?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먼저 사랑, 우리를 위한 사랑, 희생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어딘가? 갈보리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화목제물이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사이였다는 것을 말해주나? 화목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었다는 것이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런 철천지원수 관계가 깨어지려면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 그 두꺼운 담을 무너뜨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희생 없이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원수관계가 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벽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누군가 희생제물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벽, 부자간의 벽, 이웃 간의 벽...모든 종류의 벽을 허무는 방법은 누군가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제물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럴 때 그 벽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주님이 제물이 되셨듯이 오늘 우리관계 속에서 화목의 길을 열기 위해서 내가 제물이 되어야할 영역은 무엇인가?
11절,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것이 적용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그처럼 사랑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을 나도 이제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랑의 적용을 누구에게 해야 하냐 하면 사람에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 사랑의 영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 사람의 영성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해 주시는 분이니까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아무런 불편함도 원한도 없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는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나를 대해주지 않는다. 서로 불편하고, 불만족스럽고, 서로 계산한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먼저 사랑, 무조건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남의 유익을 위한 사랑을 받았다면 이제 너도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을 향해서 그 사랑을 적용하라는 것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조건을 따지지 말고 사랑하고,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면서 사랑하고, 희생을 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렇게 사랑할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이다(12절).
< 결 론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자.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자. 뜨겁게 서로 사랑하자. 요 13:34-35절은 이렇게 말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제자의 특징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다른 것은 부족해도 사랑하고 있다면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내가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까를 고민하면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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