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소속인가?(2)(요일 3:14-24)
지난주에 우리의 소속이 어딘가를 살펴보았다. 이 세상에는 두 자녀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두 가지 기준이 있다(10절). 첫째는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의는 옳은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다. 마귀의 자녀들은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옳은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
둘째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다.
이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망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 어떤 사람을 가리킬지는 다 알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 즉 불신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내가 영생을 가진 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볼 때 내가 영생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15절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15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했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 형제의 인격과 존재를 짓밟고 무시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최소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미움은 살인과 같은 것이다. 가인이 그 형제 아벨을 죽인 이유도 결국은 미움 때문이다.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자체를 무시하고 짓밟는 행위이다. 일종의 살인인 것이다. 그 미움의 마음이 결국 행동으로 드러날 때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살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다. 그 마음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5절은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없는 자 곧 구원 받지 않는 자 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마음에 사랑의 공백이 생기면, 사랑으로 가득해야 할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없어지면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을 무엇이 치고 들어올까? 미움이 치고 들어와 차지해 버린다. 다시 말하면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다.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이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우리가 한쪽을 취하면 다른 쪽은 쫓겨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기로 결단하면 미움은 도망가고, 미워하기로 결단하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미움에 내주면 안 된다. 늘 사랑으로 채워놓아야 한다.
둘째, 사랑이 없는 신자는 빛에 거하기를 포기하고 어둠 가운데 살기로 적정한 사람과 같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면 영적으로 깊은 어둠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기도가 안 된다.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 영적으로 분별력이 무뎌진다. 그리고 구원의 기쁨이 없어진다. 왜? 영적으로 어둠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 낯설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인데 이기적인 우리가 어떻게 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나?
16절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해 주셨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같이 이기적인 사람들도 이제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은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는데 우리가 받은 사랑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었기에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나?우리의 실생활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할 일은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나?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타적인 행동 즉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죽는 것만큼 힘들어 한다.
사랑 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 즐길 권리....이런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단순히 권리 포기가 아니라 권리를 포기함으로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형제를 위하여 내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의지적 결단이다. 감정으로만 사랑하려고 하면 우리는 철저하게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사람을 감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감정은 본능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말씀에 순종하기고 결단하고 의지를 드려서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고, 상대를 섬기는 삶을 살 수는 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의지를 드려서 섬기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다. 감정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행동으로 사랑하라.
그런 의미에서 17-18절은 우리에게 아주 실제적인 이야기를 한다.
사랑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할 진리라고 말한다. 어떻게 말하고 있나?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어려움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자 했다. 그렇게 사랑하자 했다.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그러나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일은 거의 없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 했다.
자기의 권리 중에 가장 큰 권리는 자기의 소유다. 내 소유를 내가 원하는 대로 쓰는 권리다. 이 재미에 사람들은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형제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 형제의 경제적 어려움을 돕기 위해서 내 물질까지 포기하면서 형제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물질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 내가 없다, 없다 말하지만 그것은 절대빈곤의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 빈곤감에서 내가 느끼는 느낌일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지금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인 약 30억 인구가 하루 1달러 정도의 돈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생각보다 부자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내 소유를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쓸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어야 한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따른다. 성경적인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우리는 명사로 사랑하지 말고 동사로 사랑하자. 우리가 이렇게 실천적인 사랑의 삶을 살 때 신앙적으로 얻는 유익이 있다(19), 이런 실천적인 사랑을 하게 될 때
첫째 우리는 내가 진리에 속한 줄 알게 된다.
즉 “아!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고 있구나!” 이런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당당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신앙적으로 늘 주눅들어있고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이유는 말씀대로 사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 없으면 자기가 초라해 보이고 자신감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담대하게 나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실천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감 확신 떳떳함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신앙생활은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얻는 유익이 또 있다
셋째, 기도응답의 확신과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21-22).
여기에 기도응답의 놀라운 원리가 있다. 요한 15:7절을 보면 주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고 했다. 이것이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조건만 채워지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기도할 때 응답이 된다 하셨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같은 말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뜻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다. 주 뜻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씀도 결국은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다. 말씀에 사로 잡혀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 뭔가? 사랑의 계명이다. 모든 율법이 이 계명에 다 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가장 말씀대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런 가운데 드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응답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담대한 신앙생활, 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신앙생활, 그리고 기도응답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는 신앙생활의 열쇠가 모두 사랑하라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여기에 다 있다.
< 결 론 >
우리는 모호한 생각이나 감정 혹은 느낌들로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명확한 기준들을 가지고 자신의 신앙을 평가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를 행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특별이 이 사랑은 말과 혀로만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이라고 했다. 형제가 어려울 때 구체적으로 돕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랑을 할 때 신앙의 확신과 자부심 그리고 기도응답의 풍성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 이런 건강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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