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 말씀 >
  • 수요예배
요한일서 강해(8)
임호남 2011-05-04 추천 0 댓글 0 조회 226

소속이 어딘가?(1)(요일 3:10-1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자녀밖에 없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다. 이 둘 밖에는 없다. 중간 지대는 없다(10절). 자녀라는 말 속에는 이들은 낳은 부모가 있다는 뜻이다. 자녀가 다르다는 것은 부모가 다르다는 것이다. 씨가 다르다는 것이다. 9절을 보면 이 씨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설명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같이 섞여 산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이 사람이 과연 부모가 누군지? 누구의 자녀인지 분멸이 잘 안 된다. 사는 곳도 똑 같고, 먹는 것 입는 것도 똑 같다. 그래서 분별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 분별을 할 수 있는가?

1. 어떻게 분별하는가?

10절, 첫째,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다. 둘째,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다.

첫째,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올바른 것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올바른 것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선을 행할 힘이 없다. 그래서 하는 모든 것이 악하고 잘못된 것들이다(시 14:1-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들은 선을 해할 수 없다. 일종의 불구자들인 것이다. 어떤 불구자인가? 선천성 善불구자들이다.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둘째,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아는 두 번째 시금석은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단지 자기 육신의 형제, 피붙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볼 때 같은 성도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2. 왜 이런 일을 전제하고 생각해야 하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개인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룬 곳이 교회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영적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다 보면 갈등과 불편함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럴 때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다면 그는 같은 형제를 미워하거나 정죄하기보다는 끝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없다면 자기와 다른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인들처럼 미워하고, 혐오하고, 정죄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를 들여다보면 교회 안에 얼마나 반목과 미움과 적대감이 팽배해 있는지 모른다. 많은 교회들이 같은 형제와 자매들을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원수처럼 지내고 있다. 교회가 진정으로 거듭난 자녀들의 모임이라면 우리가 세상 앞에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그 모습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증거하길 원하셨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이 사랑의 증거를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지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험담을 피하고, 겸손히 서로 동역하고, 서로 일치를 이루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유혹이 있을 때 예를 들어서 서로 비난하고 싶고 험담하고 싶고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유혹이 있을 때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귀가 기뻐할 일이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계명을 처음부터 우리가 주님에게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11절).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적인 것이다. 옵션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사랑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물론 선택사항도 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를 살 때 기본사양이 있고 옵션 사항이 있다. 옵션은 내가 선택하든 안 하든 자유다. 그러나 기본 사양은 내 선택과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사랑이 바로 그렇다. 사랑은 옵션이 아니다. 내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해야 할 사랑이다.

우리는 마치 선심을 쓰듯이 내가 안 해도 되는데 해 주는 것처럼 사랑을 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아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다. 나와 취향이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배경이 달라도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3. 우리는 가인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12절).

가인은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다. 미워하고 결국은 살인을 하고 말았다. 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나? 자기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1) 먼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가인과 아벨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다. 둘 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곡식과 열매로 제물을 드린 반면 아벨은 자신의 양 떼에서 양을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벨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린 대속의 제사였을 뿐만 아니라 그 제물과 함께 자신을 드린 반면 가인의 제사는 제물과 그 제물은 드리는 가인의 태도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다시 바른 제사를 드릴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기보다 거부를 했다. 그리고 그 안에 분노가 생겼고 자기보다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고 결국 살인을 하고 말았다.

2)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진리가 있다.

첫째, 자기 행위가 악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13절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겠다.

둘째, 의롭게 살 때 세상에서 잘 되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의를 행하고도 도리어 미움을 받고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셋째,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가인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왜 불의한 그가 의로운 동생을 죽였는가? 오늘 본문의 요점은 가인이 살인을 해서 마귀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마귀의 자녀였기 때문에 결국은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12절). (요 8:44, 개정)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다시 말하면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안에 의를 행할 능력이 없기에, 결국은 악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속이 이렇게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고 그분의 씨가 우리 안에 있어서 악을 행하기보다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마귀의 자녀는 아닐지라도 우리 역시 사랑해야할 사람을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내 고집대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서도 미움과 분노와 살인의 추악한 모습들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본능대로 살아가기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하다. 그럴 때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다.

4. 13절, 12절과 연관해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다. 왜 세상이 우리는 미워하는지 조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먼저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미리 하셨다. 요 15:18-19에서 주님을 이렇게 말씀하셨다.“[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 했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큰 집단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도 미워한다. 왜 미워할까?

1)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기 원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간다는 독특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구별이 불신자를 더 자극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도 자기들과 같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기들과 다르게 살 때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자기들과 같이 행동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될 때, 죄악 된 생활을 하지 않게 될 때 계속 죄를 짓고 살던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삶은 마치 빛과 같이 때문이다. 빛은 가는 곳마다 어둠을 폭로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때문에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드러나게 되고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는 것이다. 실제로 제가 알고 있는 집사님은 직장에서 일을 할 때 다른 동료들이 다 하는 부정부패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일을 계속하는 다른 동료들은 그 집사님이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 것이다.

2)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미래에 불신자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실 날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불신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이다. 그들은 미래의 심판을 부인하려고 한다. 그런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말할 때 우리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환영을 받고 있다면 정말 자신이 진정한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제자인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 결 론 >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다. 이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독특한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무어라 해도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옳은 것을 행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나와 달라도, 미워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세상에 드러내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렇게 다르게 살 때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런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구해야 한다. 세상에 굴복하지 말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음 주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로 하겠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요한일서 강해(9) 운영자 2011.05.13 0 285
다음글 요한일서 강해(7) 운영자 2011.04.14 0 146

31172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14길 78-6 (쌍용동, 서부장로교회) 큰뜻행복한교회 TEL : 041-578-9310 지도보기

Copyright © 큰뜻행복한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11
  • Total98,412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