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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반역
임호남 2009-05-13 추천 0 댓글 0 조회 171

압살롬의 반역(삼하 15:1-15) 


1, 그 후에(1) 너무 늦은 후에

‘그 후에’는 문맥상‘아버지와 화해한 후에’라고 볼 수 있다(*14:33).

그러나‘그 후에’는‘이미 늦은 후에’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형식적으로는 화해했지만 압살롬의 마음이 이미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형식적이지만 화해한 것이 몇 년 만인가? 여동생이 불행한 일을 당한 뒤 2년 뒤에 형 암논을 죽이고, 도망간 지 삼년 만에 돌아왔고, 돌아와서 만 2년을 아버지 얼굴을 못 보고 살았다. 정리하면 아버지와 관계에 금이 간지 7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7년 동안 압살롬은 점점 비뚤어져가고 있었다.


압살롬이 아버지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7년 동안 그 마음에서 자란 것이 있다. 뭘까?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불만이다.


아버지 때문에 여동생의 인생이 망가지고,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지고, 심지어 그런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도 아버지 때문에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존재, 권위를 무시하고, 부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권위를 무장해제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뭔가? 아버지를 왕위에서 쫒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잘못이 바로 잡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을 치밀하게 진행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압살롬이 보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무능한 아버지,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는 아버지였다.  남의 여자를 빼앗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집안의 문제가 생겨도 해결한 능력이 없는 아버지, 팔짱만 끼고 있는 아버지...부당하고, 무능하고,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아버지.....그런 아버지였다]


어쩌면 우리가 성장할 때 이런 아버지를 많이 보고 자랐다. 많은 가정들의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다. 그런 환경에서 우리가 성장했다. 그래서 그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그래서 압살롬 같은 사람은 아버지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2. 아버지에 대한 불효

그러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아버지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의 인생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네가 장수하고 잘 되는 비결이라> 했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했을 때 그 부모가 어떤 부모인지 말하지 않았다. 부모가 존경할만하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훌륭하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식을 사랑하라>했다. 자식이 사랑받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우리가 부모가 어떤 부모이든지 관계없이 공경해야할 이유는 그래야 내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기 때문이다.


첫째, 부모를 공경할 때 잘 된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축복한다. 반대로 부모를 거역하는 자들은 미워하신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잘 되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스스로 잘 되는 길을 막아놓고 잘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 잘 되는 길을 다른 사람이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이다. 부모 공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다.


둘째, 부모 공경할 때 장수한다.

건강의 복이다. 사람들은 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할 때 건강과 장수의 복을 받는다.  압살롬처럼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그런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절대 잘 되지 못하고, 절대 오래 살지 못한다. 압살롬도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3. 압살롬의 재능

압살롬은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똑똑하고, 잘 생겼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부모와 관계가 틀어지는 바람에 그 인생이 망친 것이다. 14:25-27절을 보자. 압살롬이 어떤 사람인가?


1)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였지만 너무 잘 생겼다. 요즘 말로 하면 꽃남, 훈남이요, 미남이었다. 심지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었다. 완벽했다.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사람이었다.


2) 이렇게 외모는 아름다웠는데 그 내면은 어떤가? 흉했다. 미움과 분노와 부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면은 황폐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은 쓰지 않는다. 외모를 보지 않는다. 내면을 본다.


요즘 사람들은 외모를 꾸미는데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 모른다. 외모와 몸매만 봐서는 나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내면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보실 때 얼마나 불편하실까? 불쌍한 영혼들이다.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체 육신 덩어리만 걸어 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외모를 가꾸기보다 내면을 가꿀 줄 아는 영적 아름다움을 개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 압살롬이 만약 자기가 받은 아픔과 상처 때문에 더 기도하고, 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 상처가 도리어 그의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만 처리를 합니다.


4. 그 후에 압살롬의 모습

  그렇다면‘그 후에’ 압살롬이 한 일이 뭔가? 아버지와 화해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전에 2년 동안 침묵하면서 암논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던 것처럼 이번에도 은밀하게 아버지를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1) 자기가 왕처럼 행사한다(1). 

자기를 위하여 병거(전용차)와 말들을 준비했다. 호위병 오십 명을 세웠다. 과시했다. 자신이 vip처럼 혹은 마치 왕이나 된 것처럼 행동했다.

2) 민심을 모았다(2-4)

아침 일찍 성문 길 곁에 서서 송사(재판)가 있어서 왕을 찾는 사람들을 만났다. 왕에게 재판까지 청하라 가는 사람이라면 참 답답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붙잡았다.

① 무조건 그 사람 편에 섰다(2하). 사실여부를 판단하지도 않고 무조건 편을   들어주었다.

②사실을 왜곡했다. 그 사람의 어려움을 왕이 들어주지 않을 것처럼 말했다(3).

왕은 부당한 존재인 것처럼 왜곡했다.  자신이 정의로운 재판관이 된 것처럼    말했다.

③ 너무 친절하게 대했다(5). 보통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거만하거나 서민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데 너무나 친절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다. 백성들이 거기에 녹아버렸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6).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4년을 그렇게 공을 들였다(7).

그리고 민심이 자기에게 향한다고 생각되었을 때 드디어 거사를 꾸몄다.


5. 압살롬의 반역

자신이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어서 헤브론에 가서 서원을 이르게 해 달라고 했다. 왜 헤브론인가? 헤브론은 다윗이 처음에 왕이 된 장소다. 정치적 고향이다. 그곳을 도리어 반역의 중심부로 삼아서 다윗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헤브론에 가서 세 가지 방식으로 반란을 일으킵니다.


1) 정탐꾼을 모든 지파에 보냈다(10). 그래서 동시다발적으로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치 모든 국민들이 그렇게 원했던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미리 파견한 정탐꾼들이 곳곳에서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2) 이스라엘의 유명인사 200명을 초대합니다(11).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초대를 받고 갔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마치 이스라엘의 유력인사들이 압살롬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기 좋았습니다. 아마 얼떨결에 그곳에 가게 된 사람들 중에서도 어쩔 수 없이 혹은 분위기에 편승해서 압살롬 편에 서게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겁니다.


3)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을 끌어들였습니다(12).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였습니다. 다윗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항상 결정적인 조언을 해 주었던 뛰어난 지략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까지 압살롬에 편에 선겁니다. 다윗으로선 다른 어떤 일보다 이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반란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민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다윗은 신속하게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도망을 가게 됩니다(13-14).


6. 다윗의 도망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아무리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왜 다윗이 그렇게 빨리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도망을 가게 되었는가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 준비해서 얼마든지 싸울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1) 예루살렘에서 아들과 피를 흘리면서 싸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 사람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파리를 독일군에게 순순하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파리에 너무나도 아까운 문화재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파리로 돌아올 것을 믿고 파리를 통째로 독일군에게 넘겨주었던 겁니다.


다윗도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보다는 다시 올 것을 믿고 예루살렘을 포기한 겁니다.


2) 다윗은 지금 자식이 아버지를 대항해서 일어난 이 반역을 단순히 인간적인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예언한대로 그 일이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징계라면 분노하고 저항하기보다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한 겁니다. 철저하게 낮아지고 깨어지기로 결심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라면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이 나면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윗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노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 결 론 >

다윗은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나게 됩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백성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입니다. 사울에게 도망 다닐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자신의 오른 팔 아히도벨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가장 믿었던 자식도 부모를 배신하고, 가장 믿었던 친구도 자신을 배신합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다윗의 시 중에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의 아픔을 그린 시가 많이 나옵니다. (시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런 배신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인생을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조차도 믿음의 눈으로 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배신당했다고 울며불며 하지 말고 역시 하나님 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그 고통과 고난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안목이 없으면 우리는 사사건건 걸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복음의 안목이 있으면 어떤 문제가 와도 문제가 안 됩니다. 도리어 영적인 축복의 도구로 바꾸어 버립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복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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