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역할(삼하 13:37~14:1-3) 09.5.6큰뜻
현대가정의 가장 큰 불행은 아버지가 있지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존재하지만 아버지라는 존재는 가정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은 거의 돈을 벌어다주는 역할밖에는 없습니다. 그 나머지 기능은 누가 다 할까요? 어머니가 다 합니다. 자녀를 가르치고, 상담해주고, 신앙을 지도하는 거의 모든 일을 어머니가 다 합니다.
아버지는 단지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밥 먹고, TV 좀 보다가 자고, 다시 출근하는 이 일 외에 가정에서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에는 아버지가 있지만 사실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가정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다윗의 가정에도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엄연히 있지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남이 여동생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이 때 아버지가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자녀를 바로 잡아야할 역할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한 일이 없습니다(13:21). 심히 노했다고 했습니다. 화를 내기만 했지 그 다음이 없습니다. 암논을 불러서 매를 들었다든지 벌을 주었다든지 바로 잡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결국 그런 다윗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이번에는 압살롬이 자기 형 암논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도망을 가 버립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14:37절을 보면 다윗은 그 압살롬으로 말미암아 하는 일이라고는 '날마다 슬퍼했다'고 했습니다. 39절을 보니 '그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부모가 자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압살롬은 우발적으로 형을 죽인 게 아니라 2년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형을 죽인 아주 나쁜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단지 인간적인 감상에만 빠져 있습니다. 자기 기분과 감정에만 몰입해 있을 뿐 그 어려운 자식의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고 내 자식, 내 자식.....> 이렇게 자신의 감상에만 빠져 있습니다. 그 가정에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도덕적, 윤리적, 영적으로 회복되어서 가정에서 바른 역할을 해 내어야 가정이 삽니다. 아버지요 남편인 남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회복되어야 합니다. 본이 되어야 합니다.
1. 요압의 작전
다윗이 이렇게 갈팡질팡 하고 있으니까 가장 가까이서 섬기고 있는 요압 장군이 압살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작전을 짰습니다.
압살롬을 다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만들어서 다윗의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요압은 왕의 신하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왕의 마음을 좀 편하게 해 줄 것인가>하는 단순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아주 지혜롭고 연극을 잘 하는 어떤 여인을 고용해서 미리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다 가르쳐 주고 다윗을 찾아가게 합니다. 이 여인은 정말 지혜롭고 연극도 잘했습니다. 다윗을 찾아가서 이렇게 연극을 합니다(14:4-8).
결국 압살롬과 암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살려주고 데리고 와야 한다는 예기를 하는 섭니다. 결국 이 여인의 배후에 요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다윗은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합니다(23). 그런데 문제는 아들을 오게 해 놓고 그 아들을 만나주지 않습니다(24절).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2. 불완전한 용서.
다윗이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뭘 말해줄까요?
형식적으로는 압살롬을 용서했지만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압살롬은 아버지가 자신을 불렀다는 소식에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해주는 줄로 알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뭘 느꼈을까요?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랬을 때 압살롬이 느낀 또 하나의 감정은‘거절’이라는 감정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거절하고 있구나! 나를 밀어내고 있구나!> 그 감정이 압살롬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집이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 아니라 가시방석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삶이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기대했던 것은 따뜻한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인간에게는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아들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압살롬은 점점 더 비뚤어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대항하게 됩니다.
1) 비뚤어지는 압살롬
보십시요. 압살롬이 어떻게 비뚤어져 갑니까?. 28절을 보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압살롬이 얼마 동안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살았을까요? 2년 동안입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주지 않은 겁니다. 아마도 다윗은 의도적으로 피했을 겁니다. 화가 난 압살롬은 자기를 데리고 온 요압을 만나려고 사람을 요압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요압조차도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29).
그래서 화나간 압살롬이 어떻게 합니까?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버립니다(30). 그러면 요압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단지 요압의 밭에만 불을 질렀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압살롬의 가슴에 뭐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분노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은 무서운 불이 그 사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이 식혀지지 않으니까 진짜 몇 년 후에는 그 불로 세상을 태워버리는 것을 봅니다. 아버지를 대항해서 반역을 일으켜서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32절에 있는 압살롬의 말을 들어보십시요. 그 말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 차라리 여기 안 오는 것이 나았다.
-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면 차라리 날 죽여라! 압살롬의 말들입니다.
압살롬은 점점 비뚤어져가고 있었던 겁니다.
2) 다윗의 무책임
이렇게 된 데에는 일차적으로는 다윗의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다윗이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째 아들 암논을 잃어버렸고 또 둘째 압살롬까지 사실상 잃은 겁니다.
만약 다윗이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눅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 같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비유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한 나쁜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뛰쳐나간 아들입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그 방탕한 아들을 먼저 껴안아줍니다. 끌어안아버립니다. 그럴 때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았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돌아온 압살롬을 끌어안아버렸다면 그의 마음을 만져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서 만나는 비뚤어진 압살롬, 아버지를 대적하는 압살롬이 아니라 다른 압살롬이 되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되찾고 아들은 아버지를 되찾는 해피엔딩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윗 집안에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용서했을 뿐 진정으로 용서해주면서 부자관계의 문제를 풀지 못했습니다.
3) 압살롬의 무책임
아버지 다윗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압살롬에게도 큰 책임이 있습니다. 압살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 죄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회개가 없다는 겁니다.
압살롬의 죄는 정말 무서운 죄입니다. 우발적으로 형을 죽인 것이 아니라 2년 동안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서 형을 죽인 치밀한 범죄였습니다.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입니다. 아버지 탓, 요압 탓, 암논 탓....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안 돌아가니까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아버지에게 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을 겁니다. 그러나 다윗 집안에는 그런 모습이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가정들에게 이런 아픔들이 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가 있고, 비뚤어진 자녀들이 있습니다. 둘 다 어떻게 그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잘해야지! 회복해야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버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해야지! 아버지를 사랑해야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신의 허물을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안에 있는 허물을 보고 인정해야 합니다.
2)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내 감정, 내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우리 가정을 치유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3)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그래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 기 도 >
1.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가정에서 역할을 회복할 수 있도록
2. 깨어진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먼저 사랑과 용서를 시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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