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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징계
임호남 2009-04-16 추천 0 댓글 0 조회 531
 

                         용서와 징계(삼하 12:13-25)


죄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죄가 있습니다. . 검사가 구형을 할 때도 죄질이 나쁘면 더 엄격하게 구형을 한다.  다윗이 범한 죄는 아주 죄질이 나쁘다


다윗의 죄는 첫째는 남의 부인을 빼앗은 죄이다. 둘째는 살인죄이다. 어느 한 가지 죄만 가지고도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이다. 파렴치범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가 진실로 회개했을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셨다(13절) 그런데 비록 죄는 용서 받았지만 오늘 성경을 보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있었다.

1) 10절 - 칼이 네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2) 11절 - 집에 재앙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이 네 처들과 백주에 동침하리라

3) 14절 -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으리라.


이 말씀대로 실제로 다윗의 삶에 이런 문제가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짚어 넘어갈 문제가 있다.


1. 먼저는 우리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지만 그 죄에 대한 결과가 남는 다는 것이다. 다윗은 정말 파렴치한 죄를 지음으로 인해서 자식들에게 아주 나쁜 본을 보인 부모가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식들을 교육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식들 중에서 자신처럼 다른 여자를 겁탈한 사람도 있었고, 자식들 중에서 자신처럼 다른 사람을 살인한 사람도 생겼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런 그들에 대해서 야단을 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볼 때 부모가 어떤 본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부모가 형편없이 살면 자식들이 알게 모르게 다 보고 배우는 것이다. 비록 본인은 뉘우친다 해도 자식들이 보고 들은 것이 그것인지라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죄는 용서 받아도 죄에 대한 영향은 남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다윗이 회개했을 때 용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다윗의 삶에 그와 같은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


1) <이것은 완전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보응과 징계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응은 쉽게 말하면 보복이다. <너 이렇게 나쁜 짓 했지 너도 한 번 당해봐!> 이것이 보응이다. 그런데 징계는 다르다. 징계는 우리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 매를 드는 것이다. 그 목적은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해서,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보응과 징계는 다르다.


그렇다면 다윗의 경우는 그것이 과연 보응인가? 징계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 다윗에게 임할 재앙이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보응이 아니라 징계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다윗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윗은 정말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 심지어 자신의 자식이 아버지를 대적해서 반란을 일으키기 까지 한다. 그런데 그런 모든 어려움에 대한 다윗의 반응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다윗은 그런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 삶이 망가지고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섭리를 발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가까워지고 그 삶이 죄 짓기 이전의 상태로 온전히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응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용서 후에도 그런 징계를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가 너무나 큰 죄였기 때문에 징계를 통해서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있는가?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무섭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다.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인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무서운 분노를 쏳아 놓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무서움을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편에서는 죄를 용서 받기 위해 고백만 하면 되지만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해서 무섭게 분노하시고 죄에 대한 심판으로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죄를 버리지 못합니다. 죄에게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런 징계를 주심으로 다윗은 철저하게 죄의 무서움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정말 버리고 끊어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이 죄짓기 이전처럼 정말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회복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에게 내린 징계는 사랑의 징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죄를 아파하고 철저하게 회개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연약해서 다시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교정하시길 원하시고 우리가 무서운 죄에서 정말 떠나시기를 원하실 때 우리를 징계하시는 겁니다.


3.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통해서 첫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하신 대로 그 아들을 쳤습니다. 아이가 심하게 앓았습니다. 아무리 죄악의 소생이라 하지만 자식은 귀중한 법입니다. 자식이 죽어 가는데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를 합니다. 그냥 대충 흉내만 내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금식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땅에 엎드렸습니다. 눈물로 호소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결사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아마 다윗이 이처럼 결사적으로 기도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간곡한 다윗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레 만에 그 아이를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간구가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의 다윗의 태도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감히 다윗에게 알리지를 못했습니다. 왕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도 저렇게 먹지 않고 슬퍼하면서 매달렸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왕이 어떻게 되겠는가?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지 않겠는가!> 겁을 먹고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변이 어수선한 것을 보고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차리고는 먹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신하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죽기 전에도 그렇게 슬퍼하던 왕이 죽고 나서는 도리어 전혀 슬퍼하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다윗이 설명을 합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혹시 금식하고 매달렸을 때 하나님이 살려주실 수도 있었기 때문이요 그러나 이미 죽고 나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는데 내가 어찌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말을 통해서 그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란 어떤 신앙을 말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뛰어 넘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하며 그것을 모든 생활 속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에게 이 신앙이 없었다면 그는 아이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 떼를 썼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느냐>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순간에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터졌을 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갈 때도, 직장을 잃었을 때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다윗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것도 끊어놓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다윗을 붙들고 있는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이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롬 8:35-39을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갔다고 해서 다윗이 실족해서 넘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가장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사랑을 끊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물질적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건강문제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입니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셨고 또한 다윗이 회개했을 때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용서해주셨을 뿐 아니라 더욱 사랑해주시는 사랑입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를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지만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해서 공의로운 징계를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분을 품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다윗에게 또 다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이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솔로몬의 다른 이름이 <여디디야>인데 그 이름은 바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위로하시고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으로 솔로몬을 주시고 그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늘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이 되기를 바란다는 믿음을 꼭 붙들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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