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왕국(삼하 3:6-21)
한 나라에 두 왕국이 있다. 하나는 다윗이 다스리는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사울의 아들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두 왕국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싸웠다(3:1). 하나님의 뜻은 두 왕국 중 어느 왕국에 있을까? 물론 다윗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길 원하셨다.
그런데 그 뜻을 거슬리고 사울 왕국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 왕국의 모든 실권을 쥐고 좌지우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군대장관 아브넬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다 순종하지는 않는다. 알면서도 다른 길을 갈 때가 있다. 아브넬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다. 그래서 쓰러져 가는 사울 왕국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사울왕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삼하 3:9-10).
[9]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삼상 13:4)
아브넬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헛된 저항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다윗을 찾아간다(12).
1. 이 과정 속에서 다윗이 한 일을 보자.
다윗도 분명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오래 전에 왕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고, 사울왕도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너무나 당연한 것조차도 다윗은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론을 조성하지도 않았다. 물론 억지로 빼앗지도 않았다. 다윗이 한 일은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왕으로 추대할 때까지 묵묵히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첫 번째로 유다지파의 왕이 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유다 지파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했다(*2:4). 이번에 나머지 11지파의 왕이 되는 과정도 그렇다. 다윗이 나선 적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했다(3:21, 5:1-3). 그런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
2. 여러분! 바로 이것이 주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가?
주님도 동일하게 우리의 삶을 다스리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 자신을 왕으로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결코 강요하지 않으신다. 다만 기다리실 뿐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자발적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초대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계 3:20).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한 그분은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으신다. 혹시 여러분 중에 주님이 억지로 내 삶에 쳐들어와서 나를 다스려 주길 바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내가 자발적으로 결단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참 된 통치자 다윗이 지금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그런데 그 통치 영역은 12지파 중에 겨우 한 지파, 수치로 따지면 12/1이다.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왕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이스라엘 땅의 12/1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12/12 즉 온 이스라엘을 전부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그 나라를 다스려야 그 나라에 진정한 평안이 오기 때문이다.
2)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두 예수님을 여러분의 왕과 주인으로 영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의 삶을 분명 다스리고 있을 것이다. 아멘!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내 인생을 다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는 고통, 혼란, 무질서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참 만족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문젠가?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왕으로 모셔놓고 실제로는 그 왕께서 내 삶의 전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겨우 12/1만을 다스리도록 내가 그분의 통치를 제한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은 겨우 12/1이 될까 말까 하는 부분뿐이다. 나머지는 누가 왕인가? 내가 왕이다. 주일만 주님이 왕일 뿐 나머지 모든 삶은 내가 왕이다.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산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 요즘 유행하는 광고 카피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모토다. 자기 생각대로 산다. 필요할 때만 예수님을 찾을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12/1의 왕으로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 삶의 왕이 되시되 12/12를 다스리는 왕이 되길 원하신다. 내 삶의 모든 것의 주인 되길 원하신다. 그렇지만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신다. 강압으로 우리 삶의 왕좌를 빼앗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결단하기를 원하신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인생을 다스리는 한 결코 내 삶에는 참 된 만족도, 평안도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고민하고, 갈등하고, 좌절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3.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만족이 있는가? 정말 생각대로 되는가?
생각대로, 계획한 대로 인생이 살아지는가? 남편, 아내, 자식 생각대로 되는가? 늘 그 문제로 고민하고 좌절하고 산다.
이스라엘 땅을 보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이 통치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땅에 평화가 없었다. 대립과 갈등, 시기, 질투, 살인이 넘쳤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욕심, 욕망 때문이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 아브넬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꼭두각시로 세워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은 사울왕국을 세웠다. 왜 그랬을까? 자기욕망과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왕 노릇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보셋은 꼭두각시일 뿐이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 자기가 왕 노릇했다. 그것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사울왕의 첩을 자기가 차지했다. 왕의 부인을 차지했다는 것은 자기가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걸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러분! 내가 인생의 왕 노릇하면서 마음대로 살면 좋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재밌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만족을 누리고 싶다면 이런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십자가에 완전히 못을 박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내 인생을 철저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 때부터 진정한 평안과 만족이 내 인생에 시작된다.
아브넬도 왕권을 내 주기 싫어서 버틸 때까지 버텼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졌을 때 드디어 자발적으로 다윗을 찾아와서 다윗에게 무릎을 꿇었다(21).
여러분!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사탄과 주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결단해야 한다. 둘 사이에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지금 결단하길 바란다. 주님을 내 인생의 12/1의 왕으로 언제까지 푸대접하겠는가? 그분께 내 인생 전부를 맡기길 바란다. 세상에 대한 미련,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주님만 믿고 나가길 바란다. 이 결단을 지금 하길 바란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참 된 평안을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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