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삼하 1:1-12)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창조하셨다. 인간만은 특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다는 것이 무엇일까? 지정의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지성이 있어서 지식을 탐구하고, 정서가 있어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어서 결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다 갖추어졌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자,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뭘까? 제가 생각할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통틀어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정서적인 부분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의 특징은 정서가 메말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불행한 일은 당해도 요즘 사람들은 별로 안타까움이 없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더 심하다. 심지어 누가 죽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한다. 도리어 더 잘됐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정서가 메마르다 못해 거의 죽어있어 있다.
성도들을 봐도 제일 부족한 것이 바로 정서적인 영역인 것 같다. 지성과 의지의 영역을 생각해 보자. 지적인 부분은 나름대로 성경을 알아가거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채워진다. 의지적인 부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려고 나름대로 결심도 하고, 애를 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감정적인 부분이다. 신앙생활을 해도 별로 감동이 없다. 흥분이 없다. 눈물도 없다. 정서적인 부분이 상당히 메말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잘못된 세대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마 11:16-19)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무슨 뜻일까?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피리를 불면 흥이 나서 어깨가 들썩여야 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닌가?
정서가 메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서가 회복되어야 하겠다. 회복을 넘어서 풍성해져야 하겠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다윗은 정서적으로 풍성하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1. 인간적인 슬픔
다윗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잃었던 처자식과 재산을 모두 찾고 시글락에 머물고 있을 때 블레셋과 전쟁을 하던 이스라엘 진영에서 한 사람이 다윗을 찾아왔다. 다윗은 그 사람에게 전쟁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어본다.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이스라엘이 참패를 했다는 것과 이스라엘 왕 사울과 요나단이 함께 전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2-4).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자. 특별히 그의 감정적인 반응을 살펴보자.
11절을 보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고 했다. 이것은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다. 12절을 보니 저녁까지 슬퍼하며 금식했다고 했다. 다윗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너무 큰 슬픔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슬퍼하는 사울이 누구인가? 자신의 원수요, 자신을 괴롭혀온 사람이다. 그런 원수가 죽었는데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혹시 다윗이 지금 쇼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사울의 죽음을 슬퍼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다윗은 이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사울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해 주시길 간절히 소원했다. 그러나 사울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죄는 미워했지만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다윗은 사람을 볼 때 죄와 사람을 분리해서 보았던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록 원수였지만 그 사람의 불행과 죽음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실 때 죄와 우리를 구분해서 보신다. 그래서 우리가 짓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우리 자체는 사랑하셔서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아도 사랑하시고, 아파하시고 우릴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의 죄를 볼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만을 보면서 사랑하고 아파할 수 있는 다윗 같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바로 그런 모습이 하나님을 닮을 모습이 아니겠는가? 불행을 당해도 남의 일 보듯이 아무 아픔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를 우리라도 닮지 않아야 하겠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감성을 다 잃어버리고 사는 불쌍한 이 시대의 사람들을 닮지 않아야 하겠다. 우리라도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감성적으로 풍성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그런데 다윗의 슬픔은 꼭 사울 때문만이 아니라 더 복합적인 것이 있다.
2. 거룩한 슬픔
12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이방민족에게 패하고 모욕을 당했다는 것 때문에 더 슬퍼했고 그 슬픔으로 울며 금식했던 것이다. 인간적인 연민에서 나오는 슬픔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을 아파하는 거룩한 슬픔의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슬픔의 감정이 있어야 하겠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가 욕을 받고 무시당하는 일들이 언론을 통해서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건으로 인해서 교회가 받은 타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일을 볼 때 다윗처럼 얼마나 아파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런 현상들을 보면서 아픔이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당장 나와 우리 교회와는 무관한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 일들이 나와 직접적 연관은 없다 해도 그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고 아파하실까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아픔일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무관심, 무감동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감정 가운데 거룩한 슬픔과 탄식이 회복되어야 하겠다. 인간적인 감성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감성이 풍부해져야 하겠다.
< 결 론 >
1.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점점 정서적으로 메말라 감동과 아픔도 모르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형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인류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부터 이런 잘못된 흐름을 바꾸어야 하겠다. 이웃의 아픔에 대해서 무관심한 죄를 회개하고, 내 개인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그 사람 자체의 영혼의 소중함까지 보지 못하는 잘못을 깨달아야 하겠다.
2.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거룩한 아픔을 모르고 살아간다. 교회가 욕을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져도 아픔이 없다. 거룩한 감정이 메말라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슬퍼할 일이다. 우리에게 거룩한 슬픔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한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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