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9:1-5(성도는 성도답게)
신약성경 중에 참 안타까운 장면이 하나 등장하는데 어떤 장면이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가는 예수님을 뒤 따라 가면서 생기는 장면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평소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모든 일에 앞장서서 움직이던 베드로가 이번에도 그런 자신의 기질에 맞게 행동을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갔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까지 갑니다. 그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깁니다. 몸은 예수님이 심문을 받는 곳까지 따라 왔지만 그곳에 있는 베드로의 마음 상태가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신분을 감추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분이 밝혀지면 곤란한 문제가 생길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명의 제자로 그냥 군중 속에 섞여 있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볼 일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혹시 내 정체가 밝혀지면 어떻게 되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아마 모자를 푹 눌러 썼을지도 모릅니다. 고개도 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군중들 속에 숨어 있는 겁니다.
그렇게 군중 속에 섞여 조용히 있길 원했지만 상황은 베드로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 예수와 함께 있었지! 그 사람의 제자가 맞지!>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분을 속입니다. <나는 절대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그런 사람 모른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지적에 대해서 베드로는 용기 있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위기상황을 모면해 보려고만 했습니다.
1. 여러분! 이 베드로의 이야기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의 자녀요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가능하면 내가 신자라는 것을 숨기고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몰라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내 신분을 알아볼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괜히 교회 다니는 것이 밝혀지면, 교회에서 집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상당히 불편한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살면서 어색하게 세상 가운데 끼여 있습니다. 왠지 그 자리가 편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그래 나 예수 믿는다. 교회 집사야. 너희들도 예수 믿어> 이렇게 당당하게 밝히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럴 용기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여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첫째, 세상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끌려 다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도리어 세상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 오늘 다윗의 문제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다윗은 지금 어중간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끼여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울이 무서워서 하나님의 땅에서 이탈해서 불신자들이 사는 블레셋 땅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블레셋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절대 평안한 생활이 아닙니다. 늘 불안합니다. 왠지 그 자리가 어색합니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세상을 주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끌려서 살아갑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붙었습니다. 블레셋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전쟁에 참전하라고 합니다. 다윗은 할 수 없이 그 전쟁에 참전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 원수의 편에 서서 자기 백성을 죽이는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끌려왔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눈치를 보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겠습니까? 얼마나 그 자리가 어색했겠습니까?
2) 여러분은 그럴 때가 없습니까? “정말 내가 여기 왜 있나” 싶은 생각을 할 때가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 때가 없었습니까? 여러분!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로 끌려 다니게 됩니다. 다윗의 문제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는 세상을 끌고 다녔는데 믿음이 떨어지니까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2. 그러니까 또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도 조롱을 받습니다. 블레셋 왕은 다윗을 데리고 전쟁에 나가려고 하는데 누가 반대합니까? 신하들이 반대합니다.
3-4절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원래 사울의 신하였고 우리 적이었던 사람인데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사람은의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년데 어떻게 우리 편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속이려고 했지만 불신자들은 안 속습니다. 불신자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예수쟁이가 여기 왜 왔냐>는 겁니다.
1)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처럼 있어도 불신자들은 다 알아봅니다. 그리고 속으로 웃습니다. <예수쟁이가 예수쟁이답게 살지 않고 왜 우리를 닮아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속으로 비웃습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아름답습니다.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세상 사람들도 비웃지 않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5절을 봅시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세상 사람들이 다윗의 참 모습을 알고 있는 겁니다. 다윗도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누가 알아봅니까? 불신자들이 알아봅니다. 다윗이 믿음이 충만할 때는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윗의 참 모습입니다. 세상의 눈치나 살피면서 어떻게 살아볼까 궁리하는 다윗이 아니라 사자처럼 표호하면서, 세상을 호령하는 모습이 다윗의 참 모습인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는 겁니다.
다윗은 다윗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도도 성도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정복할 자들입니다(마태 28:18-20). 성도들이여 성도의 참 모습을 회복합시다. 신앙의 용기와 패기를 회복합시다.
3. 하나님의 은혜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성도이고 하나님의 자녀지만 세상 사람들보다 못하게 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조롱당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만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이 땅에서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일으켜 주십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성도의 특권입니다.
1) 오늘 본문의 다윗을 보십시요. 비록 세상 사람들의 눈치나 보면서 조롱까지 당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다윗이 정말 블레셋의 신하가 되어서 이스라엘과 전쟁에 나가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만약 다윗이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과 전쟁에 나가는 순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버리는 겁니다.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블레셋 장군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윗을 불신하게 만들고 그 다윗을 전쟁에 참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위기에서 빠져 나오게 하십니다. 믿음을 잃고 세상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다윗을 하나님은 그래도 버리지 않았던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도망가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시 139:7-10).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신실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 때문에 살아갑니다.
여러분! 비록 지금 여러분의 믿음의 상태가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운 믿음, 세상 사람들에게조차 조롱 받는 그런 믿음의 상태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자신을 보면 실망합니다. 자신을 보지 마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