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하나님(고후 1:3-6)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 중에 하나가 위로다. 왜일까?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상처 받은 사람들뿐이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상처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상처가 있다. 직장 안에서도 상처가 있다. 지역끼리도 상처가 있다. 전라도 사람들은 상처가 많다. 늘 소외당했다고 한다. 충청도 사람들도 상처가 많다. 국토의 중간에 끼여서 이것도 저곳도 아닌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핫바지라고 한다. 요즘은 경기도가 수도권 규제 때문에 손해본다고 한다.
국가간에도 상처가 있다. 우리는 일본 사람에 대해서 상처가 있고, 중동 사람들은 미국과 서구 사회에 대해서 상처가 있다. 그래서 서로 날을 세우고 산다. 괜히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다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하고, 내 아픔을 보듬어주길 원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위로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위로 받을 때가 별로 없다. 가정에서도 참 위로를 받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위로 해 주는 곳도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고,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위로 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아무 곳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것이 삶의 포기다. 힘든데 어디에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말 위로가 필요하다. 서로 인사합니다. <위로가 필요하시죠. 내가 위로할께요>
위로를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부분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왜요? 참 된 위로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 위로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참 다양한 이름을 갖고 계시다.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이런 하나님의 이름들 가운데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야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위로의 하나님’이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아파할 때 그 아픔을 위로해 주길 원하신다(이사야 40:1-2).
[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너무 힘들어 하니까 혹시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할까봐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서 위로해 주고 싶은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어 할 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위로해 주길 원하신다.
2) 살다보면 환난과 고통이 있다. 내가 싫다고 어려움이 안 오는 것 아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어려움이 찾아온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지만 어려움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어려움이 올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도 내 스스로의 선택이요,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도 내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 어려움에 대한 반응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내 인생이 불행해 질수도 있고 행복해 질수도 있다. 여러분! 어려움이 올 때 낙심과 좌절을 선택하지 말고, 감사와 찬송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그런데 고통 가운데 어떻게 하면 감사와 찬송을 선택할 수 있을까?
바로 이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이 하나님의 위로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과 함께 반드시 함께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위로이다(5).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난이 넘치도록 많다면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위로도 넘친다고 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마치 숫자 놀이와 같다.
고난은 우리 인생의 마이너스(-) 요인이다. 고난은 우리의 행복, 기쁨, 소망을 빼앗아간다. 이렇게 계속해서 빼앗기기만 하면 정말 우리 인생이 부도가 나 버린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는 마이너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도 있다. 무엇이 플러스인가? 하나님의 위로가 플러스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우리인생에 희망과 용기와 소망을 불어 넣어주신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다.
그런데 결국 이것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힘들고 어려운 쪽만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분이 주시는 엄청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찬미 637,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2. 하나님이 어떻게 위로하시는가?
1) 우리 곁에 계심으로 우릴 위로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방법은 떠들썩한 방법이 아니라 잠잠하고, 조용하게 위로하신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다. 어떤 목사님이 사랑하는 아내를 일찍 사별했다. 부인의 장례를 치루는 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말로 위로했다. 그런데 위로가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장례를 치루는 동안 한 친구는 별 말도 없이, 그냥 그 장례식장을 사흘 동안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많은 사람들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되었는데 그 친구가 그냥 곁에서 말없이 있어 준 것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힘들 때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큰 위로가 된다.
우리 주님도 우리가 힘들 때 우리와 함께 계신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다시 하늘나라로 가신다고 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다. 그런데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가 가는 대신에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 하나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실까? 우리 곁에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늘 함께 해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곁에서 함께 하시는 위로의 성령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2)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이 위로 하시는 또 하나의 방법 중에 하나는 고난 가운데 주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의 문제를 접근하실 때 그 고난을 해결해 주시는 쪽보다는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쪽으로 고난의 문제를 접근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고난이 클수록 은혜도 더 크다. 특히 말씀으로 은혜 주신다.
(사 41:10)『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고난 가운데 이런 말씀들은 정말 그 어떤 위로보다 큰 위로가 된다. 고난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을 붙들기 바란다.
3) 모든 것을 아심으로 위로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아픔과 눈물, 고난을 다 알고 계시다. 하나님이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다 알고 있기에 천국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주님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위로 받기를 바란다.
3. 하나님의 위로의 목적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목적이 있다. 첫째는 내가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다(고후 1: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환난을 받는 것도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고, 자신이 받는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도 결국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걸 볼 때 위로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가장 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달변가? 목회자? 아니다.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신하의 부인이 유산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우울증이 걸려서 희망을 잃고 산다는 말은 들은 여왕이 그 신하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후에 그렇게 낙담하던 여인이 생생하게 회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왕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렇게 달라졌냐고 물었다. 그 여인의 말이 여왕이 와서 단 한마디만 했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마음 다 압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왕도 최근에 자신과 똑 같은 유산의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과 꼭 같은 고통을 이미 겪은 그 사람이 위로해 주는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하시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처럼 고통 받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기 위해서다. 아무리 목사라고 하지만 목사는 원론적인 이야기 밖에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똑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 말하면 위로가 된다.
이 말은 여러분의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이 하나님이 쓰시는 가장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상처 받은 치유자라고 한다.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기에 똑 같은 상처 받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암에 걸린 사람을 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암에 걸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이제 여러분들이 겪는 고통만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겪는 그 고통을 통해서 또 다른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일을 하기 바란다. 그래서 상처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사람들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 결 론 >
학생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수필 중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 기억난다. 남편을 일찍 사별한 부인이 홀로 되어서 그 힘든 가운데서도 자녀들을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남편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는데 가는 내내 남편이 자기의 손을 꼭 잡고 가던 그 기억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남편이 꼭 잡아 주던 그 손을 힘들 때 마다 기억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내었다는 것이다.
위로가 이렇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주고, 잡아 줄 때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바로 그런 위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문제가 많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위로하고 서로 서로를 치유하는 곳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함께 울며 함께 웃어주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서로가 필요하다. 위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상처를 받았지만 주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그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고,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승리한 사람의 위로로 새 힘을 얻고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상처 받은 치유자로 서로 살아간다면 이 힘든 세상도 살만한 세상이 될 수 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위로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 우리 주님의 위로가 있다. 위로의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에게 가득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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