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는 신앙생활(약 1:2-4)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공부를 못하는 사람도 시험을 싫어합니다. 시험이 주는 스트레스, 압박감 다 싫어합니다.
자,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시험이 필요할까요? 필요하지 않을까요? 시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요? 1) 시험이 없으면 실력을 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학입시가 없다면 어떻게 학생을 뽑을 수 있겠습니까? 사법고시가 없다면 어떻게 법관을 선발할 수 있겠습니까? 입사시험이 없다면 어떻게 사원을 채용할 수 있겠습니까? 시험이 없다면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도 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할 것입니다. 공부하지 않고서도 다 판사, 검사가 되려고 할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았으면서도 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려 할 것입니다. 시험이 힘들지만 없을 수가 없습니다.
2)시험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어떤 과목이 부족한지,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잘 하는지, 잘한다는 생각이 나만의 착각인지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평가해 볼 때 약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개발해서 결국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꼭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시험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특히 영적인 시험은 일반적인 시험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시험들이 많이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시험은 정말 수를 다 세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시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시험보다 더 어려운 것이 신앙생활의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시험은 필요할까요? 없을까요? 같은 이유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시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시험을 겪어봐야 나의 영적인 실력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을까요?
1. 시험 받는 자의 자세(기뻐하라)
오늘 본문 2절은 말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시험을 당하면 도리어 기뻐하라!!> 시험을 당하는데 왜 기뻐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저 사람, 너무 힘든 일을 많이 겪더니 정신이 좀 이상해졌구나! 안 됐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어려움이 오는데 기뻐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차라리 잘 참아라. 견뎌내라> 이런 말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기뻐하라는 말은 너무 맞지 않는 권면이 아닐까요? 그런데 아닙니다. 성경은 기뻐하라 했습니다. 롬 5장에서도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어떻게 시험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봅시다. 시험을 치는 사람이 기뻐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일까요? 이런 경우라면 시험도 즐겁게 기쁘게 치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시험문제를 다 알고 푸는 경우입니다. 뭐가 나올지 알고 문제를 풉니다.
둘째, 답도 알고 문제를 풉니다. 남들은 모르는데 나는 답을 다 알고 풉니다.
셋째, 시험을 치르고 나서 나에게 얼마나 좋은 일이 일어날지 결과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시험이라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시험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 전 김포외고에서 시험문제가 유출되어서 일부 수험생들이 문제를 다 알고 시험을 치른 것같이 무슨 편법으로 시험을 치는 경우일까요? 아닙니다. 아무리 시험 문제를 미리 다 빼어 와서 치른다고 해도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기쁘게 시험을 치를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는 시험은 다릅니다.
1) 시험의 문제를 다 압니다. 누가 주는지, 어떤 종류의 시험인지, 왜 주는지 다 압니다.
2) 답도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지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3) 결과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시험을 잘 통과하면 나에게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시험을 치릅니다. 그러니 알고 보면 기쁩니다.
야고보 사도가 시험을 겪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하면서 이렇게 기뻐하라고 했을 때는 본인이 이미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겁니다. 이미 경험해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에게 있는 시험이 얼마나 필요하고, 얼마나 큰 유익이 있는지 알기 때문에 그런 권면을 하는 겁니다.
2. 시험과 시련의 차이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험이란 단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험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다. 정확한 의미는 시험이 아니라 시련입니다. 이전 성경에는 시련과 시험을 구분하지 않고 표기를 했는데 새롭게 번역된 성경에는 시험과 시련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번역을 잘 한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도 시련이라고 표했습니다. 영어로 보면 테스트이다.
둘째, 마귀가 주는 시험이 있다. 이 시험의 정확한 의미는 유혹입니다. 영어로 보면 템프테이션 즉 유혹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 하시진 절대 템프테이션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약 1:1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즉 테스트이다. 그러나 13절의 시험은 하나님의 테스트가 아니라 마귀가 주는 시험 즉 유혹을 말한다.
유혹의 목적은 뭘까요? 그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테스트의 목적은 뭘까요? 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테스트 할 때는 결국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고 더 강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테스트를 받아보아야 내 영적인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실력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시험만 치면 형편없이 나온다면 실력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어려움만 와도 힘들어하고, 낙심한다면 그것이 나의 영적인 실력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작은 시험에도 쉽게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가나안 땅으로 갔는데 가자마자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두려워서 당장 풍요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번의 시험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시간이 가면서 점점 믿음의 실력이 자라갑니다. 실패하고 넘어졌지만 시련을 통과하면서 점점 믿음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자기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험에 통과합니다. 하나님을 100% 믿는 믿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해도 순종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란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력이 서서히 자라갔던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을 이겨내면서 믿음이 강해지고 성숙해 지는 겁니다.
영적으로 조금 긴장이 풀리고 나태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 또 한 가지 시험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또 긴장하게 됩니다. 학생들도 중간고사 치고 조금 긴장이 풀릴 때 되면 기말 고사 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정도 성숙해서 더 이상 시험이 필요 없을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는 시험을 칩니다.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나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이고, 강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축복을 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알고 나면 감사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시험이 와도 낙망하기보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이 되길 바랍니다.
3. 시험의 과정 : 인내하라
3절을 보면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사람들에게 시험이 오면 성도들은 즉각 인내에 돌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시험이란 기계를 작동시키기 시작하면 제일 첫 번째로 생산되는 열매가 바로 인내라는 열매입니다.
1) 그렇다면 시험이 오면 왜 성도들은 인내에 돌입하게 되는 것일까요?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어려움이 오면 일단 참으려고 노력합니다. 견디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참다 참다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가족들을 포기하고 도망가 버리기도 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너무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큰 어려움이 있어도 잘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참으면 참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미래가 안 보이는데, 희망이 안 보이는데 그냥 참고만 산다면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인내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참는 것은 똑 같은데 그냥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망 가운데 참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움이 심해지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소망과 희망이 생깁니다. 왜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참으면 희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도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은 어려움을 참아냅니다. 어머니가 병들어 누워 있고, 아버지는 집을 나간 집의 아이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버지가 집을 떠나면서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아버지가 돈 많이 벌어도 반드시 돌아 오께. 그 때까지 어머니 잘 간호하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아이들은 그 말에 희망을 걸고 참습니다. 그리고 해가 질 때만 되면 목을 길게 빼고 문 밖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깁니다. 밤에 밖에서 사람 소리만 들려도 아버지가 온 줄 알고 뛰쳐나갑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그 말이 소망인 겁니다. 그 말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겁니다.
시련이 오면 참되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참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굉장히 적극적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믿음이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련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런 인내의 과정을 거쳐서 믿음의 자란 사람들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75세에 하나님이 부르셨고 그 때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리라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성취되는데 몇 년이 걸립니까? 25년이 걸립니다. 100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많은 인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둘째, 요셉을 보십시요. 17세에 부모와 형제들까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존귀한 자가 된다는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데 13년이 결렸습니다. 그 동안 종으로 팔리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는 수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셋째, 다윗을 보십시요. 소년 목동이었을 때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았지만 실제로 왕이 된 것은 30세니까 수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그 동안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인내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시련이 오면 일단 우리는 소망 가운데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에 실패하면 결국은 모든 것에서 실패합니다. 인내하는 자는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4. 시험의 결과
인내가 시험의 과정이라면 인내의 결과는 따로 있습니다.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잘 참고 나면 우리에게 오는 결과는 첫째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둘째,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인내를 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내가 이전보다 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 갖추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굉장히 모난 부분이 많았고, 모자란 부분도 많았는데 인내하는 과정 속에서 다듬어지고, 깎이어진 겁니다.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내 안에 있던 불순물이 떨어져 나간 겁니다. 그래서 욥기 23;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의 단련의 과정을 통과하는 가운데 내 인격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온전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볼 때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인격에는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균형이 없이 대부분 편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다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온유한 사람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배려하는 사람으로, 절제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인격을 다듬습니다. 언제까지 다듬을까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속에 나타날 때 가지입니다.
사람은 거울을 보면 자기 얼굴이 보입니다. 옛날 거울은 구리로 만들었습니다. 구리를 자꾸 닦으면 점점 맑아져서 그 구리에 자기 얼굴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습에 주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 인격을 자주 닦습니다. 다듬어갑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성숙입니다. 성숙에는 성장통이 있습니다. 시험은 바로 우리를 성장시키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시험이 오면 그러기에 기뻐하십시요. 잘 인내하십시요. 시험이 올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요. 그래서 여러분의 인격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주님을 닮은 인격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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