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요한 9:1-3)
1.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시는데 앞을 못 보는 소경이 한명 눈에 뛰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번화한 거리를 걷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눈에 확 뜨였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한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사람의 차림새가 이목을 끌 정도로 특이할 경우입니다. 키가 크다든지, 얼굴이 아주 잘 생겼다든지, 특이한 복장을 했다든지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상대방에게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이유가 있는 경우입니다. 보는 사람이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물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자기가 관심 있는 대상이 보이면 다른 사람보다는 더 잘 봅니다. 왜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길을 걷다 소경을 보았을 때도 그 두 가지 이유가 다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소경이니까 벌써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다른 행동을 했을 겁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8절을 보니까 이 사람의 직업이 뭐였습니까? 길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눈에 잘 뜨였을 겁니다.
둘째, 예수님에게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게 살았겠습니까?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시선도 힘들었을 것이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길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더 눈여겨보았습니다. 왜요? 주님은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병자를 치료하시거나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푸실 때 그 동기에 대해서 이런 기록들이 많습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막 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주님은 아픈 사람,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시니까 앞을 못 보는 소경이 더 눈에 확 들어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아프고 힘들 때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실은 주님께서 길을 걸어 걷다가 소경을 보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픈 사람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 그 아픈 사람을 관심 있게 보았다는 뜻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뭔가 돕고 싶다는 뜻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소경을 보셨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길에서 구걸하는 그 소경을 관심 있게 보신 분이 어떤 분입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주목해서 보신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요?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자기에게 전심으로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하나님은 이 땅을 두루 살피시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 주님께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키 작은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럴 때 삭개오와 그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을 주목하기 시작했을 때 그 가정에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한 도시를 주목하셨을 때 그 도시에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국가를 주목하셨을 때 그 국가에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목하셨을 때 이 세상에 좋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눈길이 어떤 대상에게 고정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우리에게 고정될 때 좋은 일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치유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길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멈추어 지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우리 교회 위에 고정되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똑 같은 사람을 보면서도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이 다 같지 않다는 것 아시지요. 여러분도 많이 느끼셨을 겁니다. 부부가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느낌이 같지 않습니다. 부인은 마음이 짠해서 눈물을 흘리는데, 남편은 그 영화에 울 일이 뭐나 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릅니다.
3. 제자들의 시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어떤 소경을 유심히 보니까 제자들도 덩달아 관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2절입니다.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런 이상한 질문을 했을까요? 그 당시 사회적인 통념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큰 불행을 당하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할까요? 죄가 많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이 안 좋은 일을 겪을 때는 뭔가 원인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인이 죄가 있든, 그렇지 않으면 부모가 죄가 많아 자식이 어려움을 당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는 겁니다. <이 사람의 소경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1) 저는 제자들의 질문을 보면서 이런 질문 자체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습니다. <어유! 얼마나 지은 죄가 많으면 저렇게 일이 안 풀릴까? >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두 번 죽이는 겁니다. 마음에 대 못을 박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대화는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가정에 힘든 일이 있을 때도 <당신이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힘든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완전 자포자기 해 버립니다. <그래! 모두가 내 잘못이냐, 내가 죄가 많아서 그래!> 그러면서 자포자기 해버립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대화를 해야지 서로를 죽이는 대화를 해선 안 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자기 자식이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사업이 잘 안되고, 자꾸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부모가 <내가 죄가 많아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합시다.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자식들 중에서도 일이 안 풀릴 때 부모 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능력이 없어서 공부를 안 시켜줘서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못난 사람입니다. 잘 난 사람은 아무리 부모가 잘 못해줬어도 탓하지 않고 극복하고 일어섭니다. 좋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꼭 못난 사람이 부모 탓 조상 탓합니다. 여러분! 남의 탓 하는 사람이 제일 못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대게 팔자타령을 합니다. <팔자가 사나워서, 운이 없어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다>고 말을 합니다. 아닙니다.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 가지고는 결코 그 불행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인생이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소경도 평생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았을 겁니다. <내가 죄가 많아 그렇지> <내가 부모 잘 못 만나서 그렇지> 평생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살았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인생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생각 속에 갇혀 있으니까 여전히 거지로 불행하게 사는 겁니다.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신을 탓하면서 자포자기 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원망하면 내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뀌어야합니다.
2) 예수님은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소경의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3절입니다.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그렇게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고통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전환’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결론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8-10절입니다. 이 사람은 구걸하며 살던 소경 거지가 분명한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되었냐는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눈을 떴냐는 겁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가망 없는 인생,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인생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본인보다 그 사람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더 놀란 겁니다. 소경이란 장애가 도리어 하나님의 큰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고 그 사랑과 능력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3절의 말씀을 하신 겁니다. <불행을 불행으로만 보지 말고 그 불행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불행이 도리어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 안에서 불행과 고통을 보는 바른 관점입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이유도 이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째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포자기 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겪는 이 고통이 내가 죄가 많거나, 부모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를 통해서 나타날 기회가 된다고 믿어 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 가난에 처해도 그 가난이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경험할 기회가 된다고 고백합니다.
-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경험할 기회가 된다고 믿습니다.
- 미련하고 부족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받게 될 기회라고 고백합니다.
- 부족하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경험할 기회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고후 4:7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질그릇 같이 약하지만 그것 때문에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고후 12:9-10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도리어 자랑한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능욕, 궁핍, 핍박, 곤란을 기뻐한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이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이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소경이 이걸 모를 때는 보지 못하니까 세상이 깜깜했던 것처럼 그 인생 자체가 소망이 없는 깜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니까 빛이 보였습니다. 살길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에게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지금 나의 불행도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빼버리고 생각하면 내 인생에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 탓, 남 탓 하면서 인생을 어둡게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아주 큽니까?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할 기회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나! 이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자신과 주변을 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새로운 시작의 기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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