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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도자
임호남 2007-07-01 추천 0 댓글 0 조회 111

진정한 지도자(마태 9:35-38)  07큰뜻주일낮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에게 교수님이 지리산에 대해서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었다고 합시다. 학생들은 지리산을 알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겁니다. 한 가지 방법은 바로 도서관으로 뛰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지리산에 대한 서적을 통해서 알아보는 겁니다. 지리산의 위치, 면적, 기후의 특성, 식물 분포, 명승지 등등... 많은 정보를 알아 볼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지리산으로 직접 가는 방법입니다. 지리산의 구석구석을 밟으면서 보고 듣고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나무 한 포기, 풀 한 포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그 속에서 잠도 자 보고, 산행도 해 보면서 지리산에 대해서 알아가는 방법입니다.


두 방법 다 좋은 방법이지만 어느 방법이 지리산에 대한 더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직접 현장을 방문하면서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현장을 방문하면서 배운 지식이 책상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현장을 방문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의 예수님을 보십시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시사”라고 했습니다.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책상에만 앉아 계신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두루 다니셨습니다. 구석구석 다니셨습니다.  다니시면서 직접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시고 고민을 들으시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대도시의 화려한 문명도 보셨고 시골마을의 소박한 삶도 보셨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쓱 지나가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면서 보고 느끼신 것입니다.


(제가 대전에 살다가 교회를 개척하려고 쌍용동으로 이사를 왔을 때입니다. 저는 천안도 잘 몰랐고 쌍용동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차를 타고 쌍용동 구석구석을 다녀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내린 결론은 그렇게 해서는 이 지역을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쌍용동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천안 지도를 하나 구해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어느 골목에 무슨 교회가 있고, 교파는 뭐고, 단독 건물인지 상가건물인지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 교회가 필요할지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일주일을 다니니까 쌍용동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상에서 배운 지식과 현장에서 배운 지식은 다릅니다. 주님은 몸소 모든 도시, 마을을 구석 다니신 분이십니다. 


2.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직접 다니셨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1)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 땀, 수고, 아픔, 눈물, 탄식, 그리고 기쁨...이런 사람들의 가장 원색적인 모습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사람을 아는데 있어서 직접 부딪히면서 아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현장을 보아야 깊이 아는 겁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단에 서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년에 꼭 한 두 번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이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기적으로 날을 잡아놓고 전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심방이 반드시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만나는 것과 직접 가정을 방문해서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야 여러분을 더 깊이 이해하고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를 아는 겁니다)


  정치인들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위에만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삶의 현장을 겸손하게 방문해서 국민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지만 얼마나 고통하고 있는지를 좀 보고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꾸 엉뚱한 소리합니다. 나라가 어렵고 국민들은 못 살겠다고 하는데 위에 계신 분들은 경제가 너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현장을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알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땅까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 가장 힘든 곳을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당신께서도 친히 몸으로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너무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히 4:15-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16]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필요에 따라 주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것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를 잘 아는 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라.> 주님에게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어려움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분이십니다. 


2)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아셨습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필요한 것을 도와주실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방문하시면서 그들에게 행하신 것이 있습니다(35절).


첫째는 가르침, 둘째는 복음 선포, 셋째는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시는 치유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가 바로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라고 생각합니다.

-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는 일입니다.

- 가르침은 인간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는 일입니다.

- 마지막으로 복음은 인간의 영적인 욕구를 해결해 주는 일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아셨는데 피상적으로만 알지 않습니다. 깊이 아셨습니다. 전인적으로 아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당장 굶주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장 아프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육체적인 필요가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적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떤 부모님들은 자녀를 키울 때 무조건 배부르게 먹여 주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시 세 때 배부르게 먹여주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호통을 칩니다.


 사람들은 배만 부르다고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받아야 하고, 지적인 욕구도 채워져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정신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절대자가 필요하고 믿음과 신앙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된 특이한 존재, 전인격적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만 빠져도 뭔가 갈증을 느낍니다. 불만족이 있습니다. 다 채워져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을 이해하셨기에 사람들을 만나실 때 병도 치유하셨고, 가르침도 주셨고, 복음도 함께 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실뿐만 아니라 그 필요를 정확하게 채워주시는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내 모든 아쉬움과 갈증들이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기쁨이 찾아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우리의 전인적인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아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필요들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필요들이 충만하게 채워질 줄 믿습니다.


3.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도자.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시고 돕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할 것은 그분은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도시와 마을들을 구석구석 방문하면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셨을 때 주님이 느끼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36절입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음이 저렸습니다.  사람을 깊이 알고 보니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병으로 고생하고 마음의 아픔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형편을 알고 나니까 주님의 마음도 아픈 겁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이유가 뭘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아픔이 주님의 아픔이 된 겁니다. 함께 아파하신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울 때 함께 울어주시고 우리가 웃을 때 함께 기뻐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제일 마음이 아팠던 것은 사람들의 현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에게 의존하는 짐승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고 방어할 힘이나 수단이 없습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갑니다. 목자의 책임은 양들을 좋은 풀이 있고 편안한 곳으로 인도하고 어려움이 올 때 막아주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양이 길을 잃어버리고 외톨이가 되면 위험에 노출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면서 탈진해 있는 것으로 보인 겁니다. 그런데 그들을 지도할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야할 바를 모릅니다.


  어느 조직이나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계모임에도 계주가 있어야 합니다. 5-6명 이 뛰는 스포츠에도 감독이 필요하고 주장이 필요합니다. 없으면 우왕좌왕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위험에 몰리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 있는 줄도 모르고 발을 대디디려고 합니다. 리더가 없을 때 일어나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리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좋은 리더 만나는 것이 큰 복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우리 민족에게 제일 없는 복 중에 하나가 지도자 복이라는 겁니다. 5천년 역사 이래 기억에 남을 만한 리더가 별로 없습니다. 임금 중에서는 세종대왕 정도입니다. 그렇게 오랜 역사 중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리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입니까?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두바이라 나라가 있습니다. 두바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나라가 아닙니다. ‘아랍에미르트’라는 나라에 있는 7개 부족 중의 한 부족입니다. 인구는 약 142만 명쯤 됩니다.  크기는 서울의 약 7배 정도 되지만 거의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그런데 국민 소득는 3만 1000달러입니다. 계속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부족국가가 그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지도자는 사막에다 거대한 스키장을 만들고 바다 위에다 인공 섬을 건설하는 등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두바이를 가장 행복한 나라, 발전하는 나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고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달라지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리더가 필요합니다. 백성들과 같이 호흡하고 아픔을 이해하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올해 대선이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정치적인 리더뿐만 아니라 영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내 인생이 방황할 때 붙잡아 주면서 바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리더,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리더 그래서 내 인생의 방황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그런 영적 리더가 필요합니다.

 

< 결 론 >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리더입니다. 우리를 잘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도와주시는 채워주는 리더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는 리더입니다. 주님은 요 10:10-12절에서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도적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죽이고 빼앗고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밤길 조심하셔야 합니다. 잘못 만나면 다 빼앗깁니다. 돈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빼앗깁니다. 더 조심해야할 것은 영적인 도적입니다. 영적인 리더 잘못 만나면 내 인생과 영원한 삶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오로지 양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양들에게 생명을 줄까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까에 온통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이 위험에 처하면 자기 목숨을 바쳐서 양을 구합니다. 그러나 삯군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양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위험이 오면 언제든지 양들을 버립니다. 계속되는 14-15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선한 목자이신데 특징은 양을 안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깊이 아십니다. 우리의 문제, 염려, 아픔을 아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신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리더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어디에 맡기시겠습니까? 함부로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를 깊이 아시고,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그 분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길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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