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마태 9:14-17)
개와 고양이는 만나면 서로 으르렁대면서 싸웁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 대화가 안 통하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안 통하는 이유는 서로 보내는 사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들고 흔듭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정 반대입니다. 고양이가 꼬리를 들 때는 싸울 때입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내립니다. 사인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개가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어서 꼬리를 들고 흔들면서 옵니다. 그러면 고양이는 어떻게 이해할까요? 싸움하자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대화가 안 통하는 겁니다.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 사이에는 이런 대화의 단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체적인 내용이 대립과 갈등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있을 때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의 사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신약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도 하지만 아직 구약의 때를 벗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제자들도 구약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구약을 대변하는 사상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가 뭘까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뭔가 해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뭔가 노력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겁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약시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합니다. 신약 시대가 가리키는 정신은 뭘까요? 율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노력과 행위보다는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분위기는 뭔가 밝습니다. 감사와 기쁨 자유 이런 분위기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구약과 신약을 대변하는 사상들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그것은 금식과 잔치입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인간의 힘든 노력, 그리고 고통을 뜻한다면 잔치는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기쁨과 희열을 뜻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대표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해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먼저 금식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금식의 규정을 보면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한 번 대 속죄일 때 의무적으로 금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금식에 대한 강제 규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금식에 대한 전통이 생기게 되었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는 전통입니다. 이 전통은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규칙이 되어서 꼭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은커녕 맨 날 먹는 일을 즐깁니다. 그러니 금식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이해가 안 되고 경박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왜 금식을 안 합니까? >
그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을 합니다(15절).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금식 자체를 부정하거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은 사용하기에 따라 참 좋은 전통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적하신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금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할 때라는 겁니다.
마치 혼인집에 축하하러 간 하객들이 신랑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데 먹지도 않고 인상 쓰고 있으면 뭔가 맞지 않다는 겁니다. 금식해야 할 때가 있지요. 신랑을 빼앗길 때, 슬픈 일이 있을 때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잔치하라는 겁니다. 신랑이 누굴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를 결혼관계로 묘사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순결한 신부라고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랑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상 쓰고 밥도 안 먹고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기쁨으로 맞이하고 환영하고 잔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만나는 사람마다 함께 잔치 했습니다.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겁니다. 천국은 잔치입니다. 파티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잔치는 영원한 천국의 맛보기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신랑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인상 쓰고 밥도 안 먹고 금식하고 있습니다. 왜 신랑이 왔는데도 못 알아볼까요? 이 사람들의 의식이 안 바 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구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신약과 구약의 차이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이 됩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약이 옛 약속이면 신약은 새 약속입니다. 구약이 오실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신약은 오신 예수님입니다. 구약이 그림자라면 신약은 실체입니다. 구약이 약속이면 신약은 완성입니다. 구약이 율법이라면 신약은 복음입니다. 구약의 분위기가 금식이라면 신약의 분위기는 잔치입니다.
특히 구약은 끊임없이 메시야가 오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구약적인 틀로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구약적 사고를 버리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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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따지는 겁니다. <왜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합니까?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사고가 바뀌지 않으니 절대 이해를 못합니다.
2) 기쁨이 없습니다. 여전히 힘든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얼굴을 수척하게 보였습니다. 나 이렇게 수고한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참 된 기쁨이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합니다.
3) 갈등뿐입니다. 서로 너무 다르니까 계속 충돌이 일어납니다(16-17).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부작용이 생기는 것처럼, 새 술을 헌 부대에 넣어도 충돌이 생기는 것처럼 서로 갈등이 일어납니다. 싸웁니다. 전혀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가치와 옛 가치와 충돌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됩니다.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생활이 바뀝니다.
신앙생활도 사고가 바뀌어야 합니다. 사고가 바뀌지 않으면 생활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일 바꾸기 어려운 사람이 사고가 바뀌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래 된 교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는 좀처럼 사람들이 안 바뀝니다. 자신들이 해 오던 것이 제일 인 줄 압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 줄 압니다.
어떤 젊은 목사님이 오래 된 교회에 부임을 했습니다. 보니까 너무 잘 못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그곳에서 신앙생활 해 오던 분들은 익숙하니까 모르는 겁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교회를 좀 바꾸려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한 것 중에 피아노 위치를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피아노의 위치가 도저히 음악적으로 맞지 않는 곳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쪽에 있던 피아노를 어느 날 저쪽으로 옮겼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음 주 그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옮겨져 버렸습니다. 그만큼 생각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사고가 바뀌지 않으면 신앙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똑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 이해가 안 됩니다.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금식하느냐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는 거야는 겁니다.
결혼생활에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서로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서로의 사고가 달라지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왔는데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상대방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어떤 부부는 치약을 짤 때 밑에서부터 짜서 위로 올라와야 하는데 왜 위에서부터 짜서 모양이 이상하게 되느냐고 싸웁니다. 서로 살아온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신앙생활도 내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뀌어야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든 생각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둘째,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잔치와 같은 즐거운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고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왠지 교회 오는 것이 무겁고 기쁨이 없습니다.
셋째 늘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에 와도 참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몸은 교회에 있는데 내 생각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바뀌어야 합니다.
3. 신앙생활의 변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1)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믿어야 변화가 오는데 특히 생각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내가 그분을 믿을 때 주님은 내 인생의 주인과 왕이 되십니다. 그분이 왕이 되지 않으면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다하니까 적어도 내 인생에 있어서만은 나 자신이 는 절대적인 군주입니다.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왕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이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일을 믿는 겁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고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모든 죄가 용서 받습니다. 내 힘으로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 때
첫째 신앙생활이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안 되던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모든 것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믿음의 마스터키입니다. 그분을 가지고 열면 다 열립니다.
둘째, 기쁨을 알게 됩니다.
교회와도 기쁨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그분을 믿고 나면 재미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금식생활에서 잔치 생활로 바뀝니다. 교회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습니다. 기도를 자꾸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자주 만나고 싶고 대화가 하고 싶습니다. 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믿을 때 그런 일이 생깁니다.
셋째, 갈등이 사라지고 평안이 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 가치와 성경 가치가 마치 생베와 낡은 옷과 같이 서로 부딪힙니다. 새술과 낡은 가죽부대처럼 같이 모이면 서로 부딪히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는 옛날 생활과 사고방식으로는 수용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나의 왕으로 모실 때 갈등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옵니다. 모든 것이 잠잠해 집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해가 되고 기쁨을 얻고 평안을 누립니다. 복음서를 보면 누가 예수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잘 흡수합니까? 이런 종교적인 전통이나 사상이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별로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이 강하고 자기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삶이 바뀌길 원하십니까?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행동도 바뀌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님은 내 인생의 강력한 왕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럴 때 내 생각 행동 모든 것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새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생각, 습관, 생활에 머물러 있지 마십시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십시요. 예수님의 생각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십시요. 그래서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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