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의미( 누가 24:1-12) 07부활절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길 축복합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죽은 사람의 무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 무덤이 돌아가신 분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 분이 그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묘를 가기도 하고 무덤을 잘 관리하고 단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무덤은 우리에게 슬픈 장소입니다. 절망을 느끼게 해 주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후회와 회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떠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덤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슬프고 무겁습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자가의 형을 받아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시신이 무덤에 장사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의 무덤이 주는 의미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그런 의미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분과 관계 되었던 모든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무덤은 슬픔과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그랬습니다. 한없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죽자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라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자신들이 따랐던 스승이 비참하게 죽었으니 더 이상 그들의 꿈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분에게 은혜를 받고 사랑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자신들도 죽고 자신들의 꿈도 함께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새벽부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몇 여인들입니다. 이들이 무덤을 찾아간 이유는 예수님의 시신에 준비한 향품을 바를 수 없을까 해서 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아서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조금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향품을 준비해서 가지고 간 겁니다.
무덤을 향하는 이 여인들의 마음도 한 없이 슬프고 무거웠을 겁니다. 자신들이 사랑하던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죽음이란 우리에게 아픔과 절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가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천사가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합니다.
5-7절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5-7)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7)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미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 주셨는데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겁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심지어 제자들 중에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1). 그러나 예수님은 반신반의 하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몸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래서 의심과 회의 속에 있는 그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36-39).
여러분! 기독교가 일반 종교와 다른 결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라는 사실, 그분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불교, 유교, 회교.....그들의 무덤에는 그들의 시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빈 무덤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1. 소망을 준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죽음의 병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 때, 정말 견디기 어려울 때 하는 말은 죽겠다는 말입니다. <못 살겠다>, <죽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언어 습관 중에 가장 고쳐야할 습관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죽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너무 쉽게 씁니다. “배고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미워 죽겠다” 죽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씁니다. 심지어는 좋을 때도 죽겠다는 말을 씁니다. “이뻐 죽겠다”, “좋아 죽겠다” 아니 이쁜데 왜 죽습니까? 좋은데 왜 죽습니까? 고쳐야할 언어습관입니다. ‘살겠다, 살겠다’ 해도 살기 어려운 세상인데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니까 잘 되겠습니까? 언어를 고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을 대할 때도 언어를 고쳐야 합니다. ‘아이고 망할 자식’ 이렇게 하는데 자녀들이 잘 되겠습니까? 바꾸어야 합니다. ‘아이고 잘 될 자식’ 이런 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생각이 너무 절망적입니다. 맨 날 안 될 생각, 죽을 생각만 하고 삽니다. 그러니까 매사가 부정적이고 희망이 없습니다. 쉽게 낙심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절망의 종교가 아니라 희망의 종교입니다. 어두운 종교가 아니라 밝은 종교입니다. 교회 다니는데 왠지 그 사람의 표정이 어둡다. 왠지 우울하다. 엉터리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진짜 기독교인은 밝습니다. 늘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미국 코넬 대학교 의과대 교수인 헤롤드 울프 박사가 세계 제 2차 대전 당시 포로생활을 했던 25,000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울프 박사가 연구한 대상은 모두가 비참한 포로생활을 견디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고문과 학대를 견디어 내었습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겨냈던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고문과 학대와 스트레스를 이겨낸 25,000면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희망 없는 삶이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부활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기쁜 날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사람들은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힘을 냅니다. 죽음도 이겨냈는데 겁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에서 실패하고 좌절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삶이 다시 부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희망을 가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부활의 주님을 믿으므로 힘 있게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제 소망이 생겼다. 이제 살맛이 난다. 이제 될 것 같다, 희망이 있다”이런 말이 터져 나오길 바랍니다.
2. 생명을 준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과 승리를 안겨다 주는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또 하나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 여기에 꽃이 하나 있습니다. 물어보겠습니다. 이 꽃은 죽어 있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며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정확한 답은 잠시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 입니까? 이 꽃이 나무에서 잘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오래가야 며칠일 겁니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시들해 져 버리고 추해져 버리고 결국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꼭 꽃과 같습니다. 지금은 꽃과 같이 아름답고 싱싱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점점 시들어져 가고 있는 겁니다. 다만 시들어 가는 것을 연장해 보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운동을 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생명이 조금 더 연장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꽃도 관리만 잘 해주면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습니다. 우리 인간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연장하려고 노력해도 결국은 70-80살을 살다가 죽습니다. 화려한 꽃이 떨어지듯이 죽습니다.
왜 죽을까요? 너무 당연한 진리를 가지고 제가 질문을 하는 겁니까?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죽는 이유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능력과 지혜가 끝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제한된 자원과 힘으로만 살아갑니다. 내 힘, 내 노력, 내 지혜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니까 삶이 힘이 듭니다. 애를 쓰지만 내 힘과 지혜와 자원이 바닥이 나면 주저 앉아버립니다. 마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자금줄이 끊어지면 부도가 나는 것처럼 우리 힘과 능력만을 가지고 살다보면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겁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인데 우리가 그분에게서 끊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만을 살다가 생명이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모두 두려워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가족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까? 남은 자식들을 생각하니까? 그런데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는 죽음 이후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서, 혹시 영원히 나쁜 곳으로 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죽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일일까요?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도 아니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신앙이 좋은 사람은 기뻐하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장례식은 슬픈 의식이 아니라 고인을 이제 더 좋은 천국으로 환송하는 환송식으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잠시 이 땅에 살다가 영원히 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힘든 세상살이에서 영원한 안식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아픔도 이겨내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요한 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죽어도 심판을 받지 않고 지옥으로 가지 않고 영원한 천국으로 간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소망을 줄 뿐만 아니라 죽고 나서도 영원한 천국을 약속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위로와 능력을 공급 받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천국으로 갑니다. 이런 은혜를 누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분을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겁니다. 믿기로 결단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안에서 참 소망 속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