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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왕
임호남 2007-04-01 추천 0 댓글 0 조회 170

겸손한 왕(눅 19:28-40)  


나라마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가 있습니다. 체제에 따라 통치자를 부르는 이름이 조금씩 다릅니다. 대통령 혹은 수상 혹은 왕이라고 부릅니다. 투발루라는 작은 섬나라는 인구가 12,000명밖에 되지 않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도 통치자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미국일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세계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과거 독재정권 시절이야기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느 곳을 순시하기로 계획이 잡히면 대통령이 지나가는 길을 미리 다 포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시야에 거슬리는 시설물들을 미리 다 철거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권세가 막강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분은 우주의 왕이십니다. 만약 그 분이 권리를 다 행사하신다면 그 분 말 한마디에 온 우주가 복종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왕은 자신의 권세를 다 행사하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자신을 위해서 쓰면 폭군이 됩니다. 그런데 국민을 위해서 쓰면 선군이 됩니다. 겸손히 섬기는 왕이 좋은 왕입니다. 우리 주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온 세상의 왕이지만 그분은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권리를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눅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 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심지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몸소 씻겨주시면서까지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고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진 분이시지만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 오실 때 해산할 곳도 없어서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좋은 집도 산부인과도 아닙니다. 짐승들의 우리에서 짐승과 같이 태어났습니다. 좋은 이불이나 침대에 누이신 것이 아니라 말 구유통에 누우셨습니다. 가장 밑바닥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세리, 죄인, 병자, 창녀,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주신 왕이십니다. 그분은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다가갑니다. 교만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 피합니다. 가정에서도 서로 섬겨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섬기고 아내가 남편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평안해지고 천국이 됩니다. 그런데 서로 대접 받으려고 하고 서로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 이상하게 가정에 싸늘한 기운이 돕니다. 찬 바람이 붑니다. 대통령도 국민을 섬기면 인기가 많아집니다. 사장도 사원들을 섬기면 회사가 잘 됩니다.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대해야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하신 주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그 주간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고난주간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번 한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최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의 주의 발자치를 묵상하게 될 겁니다. 그분의 발자치를 따라 우리도 함께 따라 갈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는 주보에 간지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의 모습 특히 겸손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앞서가신 겸손의 왕

28절을 보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데 제자들 앞서서 가셨다고 했습니다. 앞서가셨다는 뜻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야하겠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그 죽음의 길을 당신 스스로 앞장서서 가시는 겁니다. 정말 주님은 겸손한 왕이시고 섬기시는 왕입니다. 비겁한 왕은 절대 힘들고 어려운 일에 자신이 앞장서지 않습니다. 부하들을 시키고 자신은 뒤로 빠집니다. 대신 좋은 일에는 앞장섭니다. 그러나 참 된 왕은 다릅니다. 힘들고 섬기는 일에 먼저 나섭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갈 때도 자신이 앞장섰습니다.


  그 공동체의 성숙도를 보려면 어려울 때를 보면 압니다. 평소에는 서로 잘 지내지만 정말 어려울 때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어려운 일인데 서로 발을 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서로 밀어줍니다. 그런데 좋은 일에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일에 먼저 나서라고 서로 밀어줍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뒤로 빠집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는 안 좋은 일에 자신이 먼저 나섭니다.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이 방패막이가 되어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자신 뒤에 있는 여러 사람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진짜 좋은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서로 섬기기 위해서 희생하기 위해서 앞장 서길 바랍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도 앞장서신 겸손한 왕이십니다.

 

2.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입니다.

  왕이 입성을 할 때는 격식이 있습니다. 주님도 왕이셨기 때문에 왕의 도시인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격식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그 격식이라는 것이 우습습니다.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런데 나귀도 한 번도 누가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세상 군주들은 입성할 때 나귀를 타지 않습니다. 우람한 말을 탑니다. 근육이 든든하고 키가 훌쩍큰 멋진 말을 탑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려한 마차를 타고 입성을 합니다. 그것에 비하면 나귀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것도 어른이 나귀 새끼를 따면 그 모양세가 우습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50cc짜리 작은 스쿠터를 타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헬멧까지 쓰고 동네에 나타나면 아주머니들이 다 웃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헬멧까지 쓰고 조그만 한 오토바이를 타니까 우스운 겁니다.  어린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왕의 위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어린 나귀새끼를 타셨을까요? 그분이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슥 9:9절은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겸손의 왕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가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마지막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도 철저하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시작해서 평생을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셨는데  마지막 가는 그 길만이라도 한 번 우주의 왕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한 번 마음껏 행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큰소리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참고 견디다가도 한 번은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한 번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쓰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기위해 매맞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쓰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으려는 군사들이 찾아 왔을 때 베드로가 저항하려고 칼을 뽑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못 박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도 못 박힌 강도를 구원시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분은 겸손한 왕이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다 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겸손합니다.

 

3. 레드 카펫을 거부하신 겸손의 왕

  여러분! 영화인들 시상할 때 보면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결혼식장에도 멋있는 카펫이 깔려 있습니다. 귀한 사람들을 맞이할 때는 레드 카펫을 사용합니다.  외국의 국빈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레드 카펫을 깝니다.  그런데 왕이신 우리 주님이 가는 그 길에 깔린 것은 레드 카펫이 아니라 사람들의 겉옷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귀새끼에 자신의 겉옷을 깔아서 안장을 대신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자신의 옷을 벗어서 주님이 가는 그 길에 깔아서 왕의 행차를 축하합니다. 비록 레드 카펫은 아니지만 그 어떤 유명한 사람들의 행차보다 더 감동적인 행차였습니다(35-36).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서 화려한 레드카펫을 깔아 줄 수 있지만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깔아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겉옷을 말 위에 그리고 길에다가 깔았습니다.  주님은 화려한 카펫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뭘까요? 겸손한 마음입니다. 왕이신 주님을 겸손히 맞아들이는 마음을 주님은 가장 귀하게 보십니다.


여러분!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37-38절을 보십시요. 주님이 왕이심을 알아 보고 환영한 사람들은 높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평범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기뻐하고 그들이 축하하고 찬양했습니다. 겸손의 왕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한 자들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가난한 심령 속에 임합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보여집니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 결 론 >

   오늘 본문을 보세요. 제자들은 찬송하고 기뻐할 때 그 찬송과 기쁨을 불편해 하고 가로 막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39).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교만하다고 책망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늘 우월의식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할 때 겸손의  왕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성도 올라가는 영성이 있고 내려가는 영성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끊임없이 올라가는 영성을 추구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열심히 기도하면 조금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내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려가는 영성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 도리어 겸손할 때 그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임함을 알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지 허물과 죄가 많은지를 깨닫고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고백할 때 그렇게 원하던 은혜가 내 마음에 채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마음에 임합니다.)


  모두가 찬송하고 기뻐할 때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비판했고 불평했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의 입술에는 찬양이 가득했습니다.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의 왕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버리신 왕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 어떻게 오셨습니까? 당신 자신이 먼저 우리 앞에서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비천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욕과 멸시를 받으셨고 마지막에서는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내가 너를 사랑한다” 당신께서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시고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왕이신 그분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어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는데 우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가 그분을 거부하고 그분을 문밖에 세워놓겠습니까? 여러분! 겸손의 왕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릴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신 그분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쁨과 찬양이 가득한 삶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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