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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1)
임호남 2007-03-25 추천 0 댓글 0 조회 137

제자도(1)(마태 8:18-22)   07큰뜻주일낮


제자라는 단어는 ‘따르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따릅니까? 스승의 가르침이나 사상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사상뿐만이 아닙니다. 스승의 삶을 뒤 따라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스승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합니다.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 어떤 청년이 뭔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유명한 스승을 찾아 나섭니다. 산 넘고 물 건너 어렵게 고매하다는 스승이 살고 있다는 것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받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럴 때 보면 스승들은 잘 왔다고 절대 환영하지 않습니다. 아예 문도 안 열어줍니다. 만나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 같은 제자는 필요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면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않고 밤새도록 집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다음날 스승은 마지못해서 받아 주는 것처럼 하면서 그 사람을 제자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진짜 어려움이 시작됩니다. 제자가 되었다고 그 즉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법이 없습니다. 그 때부터 무슨 일을 합니까? 대부분 물을 길러 오는 일을 하거나 하루 종일 나무만 팹니다. 그러기를 한 삼년 쯤 합니다(다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받을 훈련을 위해서 기초체력을 다지는 겁니다. 크게 쓸 사람들은 이렇게 낮은 곳에서부터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못 견디는 사람은 돌아가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을 잘 견디고 있다보면 어느 날 드디어 스승이 자신만이 갖고 있는 학문이나 무술을 전수하기 시작합니다. 진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몇 년 수련을 쌓고 하산을 하고 세상을 평정합니다. 거의 대부분 이런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한결같이 스승이란 분들은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문전박대하고 몇 년씩 고생을 시킬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 이 아이가 내 제자가 되려는 각오가 되어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정말 내가 이 아이에게 내 사상이나 내 무술을 전수해도 괜찮을 아이인지를 떠보는 겁니다. 아무나 받았다가 중간에 포기해 버린다든지, 어설프게 배워서 스승의 인격에 욕을 먹이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된 사람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고생할 각오도 하지 않고 찾아 왔다면 동기가 의심스러운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과 삶을 뒤 따르는 사람입니다. 참된 제자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스승의 가르침을 지켜 나갑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고난이 와도 끝까지 스승님의 얼굴에 먹칠이 되지 않도록 자존심을 지킵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자의 도이기도 합니다. 세상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도 온갖 어려움을 각오하면서 배우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 고난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과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때부터 우리는 구원 받은 성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삶을 통해서 주님의 도를 배우고 실천해 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제자가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 교회 안을 보면 모든 성도가 다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주변을 보십시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온 사람들입니다. 뭔가 볼 것이 있고 뭔가 얻을 것이 있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런 사람들 하고는 다릅니다.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성도는 많은데 제자가 별로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해서 온 사람들은 많은데 정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은 참 된 제자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준비가 된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제자가 되길 바랍니다.


1. 어떤 사람(1)

  어떤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서기관이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제가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으니 훌륭한 결단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말에 대해서 내가 너를 받아주겠다 못 받겠다 둘 중에 하나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주님은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2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동문서답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한 사람에게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멋있는 일이 아닙니다. 환상도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현실을 정확히 알고 따라야 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조차도 없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이런 것이라는 겁니다. 여우에겐 위험을 피하고 돌아갈 수 있는 굴이 있고 새도 안식할 수 있는 둥지가 있지만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를 따라오려면 마치 굴을 버린 여우처럼, 둥지를 떠난 새처럼 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① 여우가 굴이 없고 새가 둥지가 없으면 돌아갈 자리가 없는 겁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겁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 다른 곳을 보면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자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앞을 향해서 주님만 보고 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② 보장된 생활,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라.

주님을 따르려고 했던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는 유대 사회에서는 아주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서기관의 직책만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편하고 존경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보장된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우가 굴을 떠나면 고스란히 비바람을 다 맞아야 합니다. 위험에 노출되어야 합니다. 새가 둥지를 버리면 고스란히 풍파를 다 맞아야 합니다. 제자의 삶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보장된 신분, 보호막을 걷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떠나는 것이 제자입니다.


온실 속에서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온실 속에 있으면 모든 것이 편합니다. 온도를 다 맞춰줍니다. 비바람과 추위를 다 막아줍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실 속에서는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실 속에서만 머물러 있으려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편안하게만 믿으려고 하지 정말 내가 믿는 그분의 가르침과 삶은 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은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난과 모욕 받을 각오하면서까지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가 제자가 되려면 나의 굴이나 둥지에서 떠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내 보호막을 걷어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완전히 바닥에서 시작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만 백 퍼센트 의지하는 믿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진정한 제자가 태어납니다. 이제는 온실 속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온실을 박차고 나와서 온 몸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제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2. 또 다른 사람(2)

  오늘 본문을 보니까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자신의 부친을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먼저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주님을 따르겠으니 허락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주님은 다소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 하시니라”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따르겠다는 것은 먼저 인간적인 도리를 하고 나서 따르겠다는 뜻인데 주님은 말씀하기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엉뚱하게 대답을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왜 이런 대답을 하셨을까요?


저는 왜 주님이 이런 대답을 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기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도가 뭔지를 생각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제자도는 무엇일까요?

1)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우선순위의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혹은 육신의 부모님이냐 영적 부모님인 하나님이냐?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과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제자는 결단해야 합니다.

(저는 대학 4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때 가장 큰 고민은 부모님에 대한 책임문제였습니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제일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께서는 그 부분까지 주님께 맡기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책임져주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2) 시간의 문제입니다.

  제자가 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선택이냐 후에 해야 할 선택이냐는 겁니다. 이 사람은 지금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지금 이 사람의 부모님이 위독해서 곧 돌아가실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때 장례가지 치루고 나서 제자가 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결국 제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되면 따르겠다. 내 형편이 되면 언젠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은 결국 제자가 되지 않겠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형편과 처지가 되는 사람들만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조건이 다 되어서 제자가 된다면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교회 일을 좀 합시다.” 그러면 <자녀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그 때 하겠습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 때 하겠습니다.> 이런 말은 핑계입니다. 그 때가 되면 하겠다고 하지만 그 때는 우리가 보장할 수 없는 겁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우리가 그 때를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삶이 언제 내가 원하는 만큼 평안하고 안정될 때가 있었습니까? 이 문제가 되었다 싶으면 저 문제가 생기고 항상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제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3) 영적인 시각으로 보라는 겁니다.

무엇이 중요하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에게 있어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자살을 하고, 인생의 질병과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누가 구원해 내느냐?>  그러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없다.> 지금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을 구원해 낼 사람이 없다고 안타깝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나 대신 저 사람을 보내세요. 서로 미루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핑계를 댄다면 아무도 제자가 될 수 없을 겁니다. 부모님을 장사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 일은 굳이 네가 하지 않아도 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은 장사지내는 그 일은 하나님의 부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안목이 없는 사람들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너는 더 큰 대의를 위해서 나서라는 겁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란 드라마를 보니까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위해서 거의 평생을 전장에서만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충무공의 어머니가 그런 이순신 때문에 섭섭하다가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당연하다고 격려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가를 위해서도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부름과 사람의 부름 사이에 갈등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제자는 따르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미루지 마시고 제자의 길로 들어서기 바랍니다. 내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참 된 제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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