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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비판
임호남 2007-01-07 추천 0 댓글 0 조회 115

건전한 비판(마태 7:1-5)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비판이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비판을 금하시고 있는 겁니다. 얼핏 보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모든 종류의 비판을 금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종류의 비판을 금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올바른 비판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이 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 없이 살아갈 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가 다윗의 죄를 가차 없이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 비판으로 인해서 다윗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올바른 사람이 됩니다. 건전한 비판은 필요합니다. 주님이 금하신 것은 올바른 비판이 아니라 잘못된 비판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비판일까요?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잘못된 비판입니다. 사람들은 비판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비난을 할 때가 많습니다.


비판의 목적은 그 사람을 교정하고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비난은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은 옳지 않습니다. 둘째는 비판을 위한 비판입니다. 건전한 비판은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입니다. 바른 길을 제시하면서 하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비판은 건설적인 대안은 제시 못하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합니다. 주님은 이런 비판을 금하셨습니다. 왜 이런 비판을 금하셨을까요?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비판은 자기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비판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영적인 성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신이 남보다 우월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겁니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남을 비판합니다. 또 <자신은 남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대부분 이런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남을 자기 아래로 생각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성장은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는 만큼 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비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살필 줄 모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남보다 우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어둡고 어린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봅시다.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외식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실제의 자기와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없으면서 경건한 모양만 갖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남들에게는 그렇게 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경건한 사람들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제일 많이 책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은 이유가 뭘까요?   이 사람들은 남들은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의 문제만 보았지 자신들의 문제는 전혀 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십년, 이십년을 살다보니까 영적으로 전혀 성장이 없이 살아가는 어린아이요, 영적인 소경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너희들이야 말로 영적으로 캄캄한 소경이요, 우매한 자들이라고 혹독하게 책망을 받았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부족한 모습이나 허물이 보이면 그 사람을 지적하기 전에 먼저 일차적으로 자신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그런 부족한 모습이 없는지, 내 안에 잘못된 모습이 없는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2. 비판이 나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는 데 있습니다.   부메랑이란 기구가 있습니다. 던지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기구입니다. 비판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내게서 떠난 그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서 나에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되돌아올 때는 내가 던졌을 때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을 가지고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비판이 무섭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니라.>


내가 비판한 그 비판이 나를 비판하는 기준과 근거가 되어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겁니다. 결국 나를 비판할 근거를 누가 만들어 준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 준 겁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내가 남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가차 없이 비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에게 그와 비슷한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비판을 받았거나 내가 비판하는 것을 보았던 사람들도 가차 없이 나를 비판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내가 남에게 엄하게 대했던 것과 같이 나를 엄하게 대우하실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일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만약 우리가 남에게 가차 없이 비판을 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서 조금도 인정을 봐주지 않고 심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남의 허물은 그렇게 잘 보았으면서 왜 너희 허물은 그렇게 보지 못했느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 2:13『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남에게 긍휼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긍휼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요. 우리가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 비판한 대로 나도 비판을 받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이 잘못했을 때 비판하기보다 감싸주고 용서해주었다면 그들도 내가 잘못했을 때 나의 잘못을 감싸주려고 할 겁니다. 결국 주는 대로 받는 겁니다. 여러분이 무슨 대접 받기를 원하는지는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하는 겁니다. 좋은 대접 받고 싶으면 좋게 대접하라는 겁니다. 뿌린 대로 거두게 됩니다.


3. 비판의 목적은 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판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 비판이 비판을 위한 비판이거나 비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판의 목적은 남을 파괴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비판의 목적을 항상 기억하십시요.


1)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끼리 더 조심해야 합니다.

 뭐든지 가까우면 더 잘 보입니다. 그런데 좋은 점도 잘 보입니다만 사실은 약점이 더 잘 보입니다. 이상하게 우리는 좋은 점은 잘 못 보면서 약점은 기가 막히게 잘 보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가까운 사람의 약점을 더 잘 지적하고 비판할 위험성이 많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누구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았다고 했습니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입니다. 형제란 가까운 사이를 말합니다. 친구사이입니다. 부부사이입니다. 또 같이 신앙 생활하는 성도사이입니다. 이런 사람이 형제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려면 대충해서 보았을까요? 꼼꼼하게, 자세하게 보았을까요? 꼼꼼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굳이 꼼꼼하게 보려고 하지 않아도 늘 같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작은 허물도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 대해 더 관대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잘못이 많기 때문에 허물이 많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잘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만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같이 한 일년만 살아 보십시요. 그렇게 좋아보이던 사람들도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보일 겁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비난하기 보다는 더 서로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부부관계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부는 정말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입니다. 그러기에 더 서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합니다. 잘못하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쉽게 비난하기가 쉽습니다. <왜 그 모양이야? 사람이 왜 그래!> 쉽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비난은 상대를 파괴시키는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상대를 사랑한다면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약점을 감싸주고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바라는 결과는 그 사람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세움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요.


2) 또 하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성입니다.

3절을 봅시다. 이 말씀 안에는 우리의 한계를 아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는 남의 약점은 잘 보면서 남보다 더 큰 내 약점을 잘 보지 못한다는 한계성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 자신의 대해서는 아주 관대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슨데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면 필수품인데 남이 하면 사치품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모순을 범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들보가 뭘까요? 쉽게 말하면 기둥입니다. 자기 눈에는 기둥이 박혀 있으면서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있으면서도 그것은 전혀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가족들과 자녀들의 아주 사소한 잘못만 지적하고 고치라고 야단만 칠 때 과연 그 지적이 권위가 있을까요? 잔소리가 될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주고 싶다면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내어야 합니다. 내 눈에 들보가 박혀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습니까? 어설프게 빼내려고 하다가 도리어 다른 사람의 눈까지 상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려면 먼저 내 큰 잘못부터 고쳐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잘못도 고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왜요? 내가 잘못된 생활에서 올바른 생활로 돌아선 경험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비판의 목적은 깎아내리고 무시하고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고 도와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그리고 그렇게 도와주기 위해서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모순을 제거하고 내가 먼저 변화된 경험이 있을 때 제대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 결 론 >

비판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조심해야합니다. 부부관계, 성도관계, 이웃관계에서 우리는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비판은 나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하기 위한 목적의 비판이 아니라 겸손히 자신을 살피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비판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라고 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하라 했습시요.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십시요. 그럴 때 내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성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다른 사람을 향해서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 제대로 돕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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