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죽음이 주는 교훈(6:14-29) 17수요
14절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다고 했습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2-13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전역으로 흩어져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땅에 더 많이 알려졌을 겁니다. 그런데 14절은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바로 헤롯왕입니다. 이 헤롯왕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있었던 그 헤롯왕이 아니라(그 헤롯은 헤롯대왕이라고 합니다), 그 헤롯왕의 아들로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1.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마음 가운데 두려워하는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왜 두려워했을까요? 세례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능력이 세례 요한이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헤롯은 세례 요한을 굉장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렇다면 왜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이렇게 의식하는 걸까요? 17-29절에 바로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습니다.
무슨 내용일까요(18). 헤롯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자기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을 책망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헤롯은 원래 부인이 있었습니다. 아라비아 왕인 아레타스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을 돌려보내고 자신의 동생의 처인 헤로디아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럼 헤로디아는 어떤 여자일까요? 헤롯왕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의 딸입니다. 그런데 이 헤로디아가 누구하고 결혼하느냐 하면 헤롯대왕의 다른 아들 가운데 하나인 헤롯 빌립 1세와 결혼을 합니다. 자기에게는 이복 삼촌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을 버리고 다시 전 남편의 이복동생인 헤롯왕과 결혼을 합니다. 자기에게는 헤롯왕도 역시 이복 삼촌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집안이 완전히 콩가루 집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헤로디아라는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잘못을 알고는 그들의 잘못된 죄를 공개적으로 책망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헤롯왕의 입장에서는 자기 가족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당시에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세례 요한이 계속해서 떠들어 대니까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 입을 막으려고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17).
그러나 헤로디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요한이 살아 있는 것이 눈에 가시처럼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요한을 없앨 것인지를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죽을 수 없었던 이유는 남편 헤롯이 요한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자기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요한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마음에 요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책망을 하면 불편하기는 했지만 옳은 소리라고 여겼습니다(19-20).
3) 그런 가운데 드디어 일이 터졌습니다.
헤롯왕의 생일잔치 날이었습니다. 왕은 자기의 생일잔치에 자기 밑의 신하들과 군대의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족들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베풉니다. 한 참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을 때,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와 춤을 춥니다. 그런데 그 춤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이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서 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22-23).
보통 아빠들이 술을 한 잔 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아이들에게 막 선심을 쓰는 것처럼, 헤롯왕도 술기운에 딸에게 <원하는 것이 뭐냐,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 딸이 영악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바로 이야기 하지 않고 쪼르르 자기 어미에게 가서 무엇을 구할지 물어봅니다. 그러나 평소 요한을 눈에 가시처럼 생각했던 헤로디아는 딸에게 <아빠에게 가서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딸은 어미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에게 달려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순간 헤롯왕은 당황했습니다. 설마 자기 딸이 자기에게 이런 요구를 할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겁니다(26). 그러나 결국 딸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왜 그렇죠? 자기체면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딸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큰소리 쳤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자기의 체면이 깎이는 것이 싫어서 결국은 딸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 요한은 생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이게 오늘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
1) 세례 요한의 죽음이 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젊은 나이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명을 다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요한의 사명이 뭡니까?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사명을 다했습니다.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사명을 끝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사명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을 때,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명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헤롯왕처럼 이 땅에 살면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면서 살면 뭣합니까? 그가 죽을 때, 그 죽음이 부끄러운 죽음이 될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떨까요? 그는 심판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어떻습니까? 비록 세상적으로 볼 때는 비참한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영광스러운 죽음이고, 사명을 끝낸 충성 된 사람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헤롯처럼 살지 맙시다. 자기의 부귀영화, 쾌락, 즐거움, 자기 욕망만을 위해서 살지 맙시다.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삽시다. 사명을 이루고 주님 앞에 섭시다.
2) 헤롯은 계속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했습니다.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소문을 듣고는,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에 찔림이 있으니까, 불안이 있으니까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고 들리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러지 맙시다. 여러분의 양심에 찔리는 것이 있습니까? 양심이 여러분에게 고발하는 것이 있습니까? 더 이상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지 맙시다. 이제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칩시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삽시다.
셋째, 요한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서기관, 바리새인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담대합시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합시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시다.
넷째, 이 세상을 알고 기도합시다.
여러분, 오늘 헤롯왕이 보여주는 모습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1) 헤롯왕과 헤로디아는 가정을 파괴한 사람들입니다. 부인을 버리고 자기들의 욕망대로 새로운 결혼관계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음란합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자기의 욕망대로 삽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람도 죽일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갑니다.
2) 정치판은 어떻습니까? 음모와 술수가 난무 합니다. 자기의 권력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치인들은 드러난 죄인과 드러나지 않은 죄인 딱 두 종류라고 했습니다. 정치인들을 너무 믿지 맙시다. 세상은 이런 곳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지켜야 하고, 우리가 이 땅의 도덕과 윤리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책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 기도 > 낮엔 해처럼, 빛의 사자들이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생각이 행동이 윤리와 도덕이 달라야 합니다. 죄악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을 닮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합니다. 나부터 하나님의 기준 앞에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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