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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권위
임호남 2016-07-14 추천 2 댓글 0 조회 410



영적인 권위(마가 1:21-28) 2016수요

 

21절을 보니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몇 몇 제자들과 함께 드디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 사역지가 가버나움인 것 같습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통치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주님은 가는 곳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길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에 들어오자마자 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가르칠 기회를 가졌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 성년 남자는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있는데, 그 권리를 이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듣던 청중들이 주님의 가르침에서 뭔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권위라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니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여러분! 권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권위는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지탱해주는 힘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는 이 권위라는 것이 무너졌다는 겁니다. 어른의 권위, 부모의 권위, 대통령의 권위.....이런 권위들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사회를 지탱해줄 힘이 상실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교회도 권위를 잃으면 사람들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권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권위는 제도나 계급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저의 말을 따라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넘는 어떤 권위가 있어야합니다.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느낀 권위는 그들이 지금까지 느낀 권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지금까지 그들을 가르쳤던 서기관들에게는 독자적인 권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에게 배웠다는 것을 가지고 권위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면서 권위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또 가르칠 때 얼마나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권위가 유지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스스로가 권위를 만들어 내는 권위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는 죽은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심오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마음을 울리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느 날 회당에서 서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은 서기관들처럼 <누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스스로가 그 말씀의 해석자이시면 선포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권위라는 것을 느꼈던 겁니다(22). 우리에게 이런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직분이나 경력으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그런 영적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권위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주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1:8).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힘 있게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8;18-20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왜 그런 권위를 주십니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때 세상의 권세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줄 믿습니다. 실례를 한 번 보겠습니다.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마침 거기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매주 이곳을 드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 귀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거기에 있어도 아무런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귀신들린 자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사단의 권세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우리는 영적전투, 영적전쟁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생활하면서 이런 영적 전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노력 없이 적당히 믿으면 이런 영적전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단은 즉각 자신의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사단은 강력하게 대항을 합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잠잠하다는 것을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이 없다는 것은 영적으로 내가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싸움이 있습니다. 사단은 복음이 전해지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변화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는 곳마다 조용한 그 회당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충돌이 있어야 변화가 있습니다. 전쟁이 없는 곳에는 승패도 없습니다. 어떤 영적인 문제는 싸워서 결판을 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영적으로 사단에게 계속해서 눌려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주님의 존재 때문에 귀신이 위협을 느꼈습니다(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귀신이 주님의 권세를 인식했는데, 그 권세가 자신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래야 합니다. 우리가 사단에게 이런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경우 이런 그림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왠지 사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그런 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사단도 어느 정도 권세가 있지만 제한적인 권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만 하면 아무런 두려운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귀신에게 명령했습니다.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 나오라고 했습니다(25). 그럴 때 귀신이 그 명령에 굴복했습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지배받던 한 영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된 겁니다.

 

주님이 가는 곳마다 영적인 승리가 있고 죽어 가는 자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이 주신 영적 권세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꾼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서, 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합시다. 영혼 구원과 제자 삼는 일을 위해서 늘 기도합시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시다. 영적인 싸움을 포기하지 말고 나아갑시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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