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누가 2:22-32) 08.12.14큰뜻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물론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기다릴까요?
아이들이 기다리겠지요. 아마도 선물을 기대하기 때문일 겁니다.
상인들도 기다리겠지요. 그 때 한 번 장사가 잘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성탄을 기다리고 있나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믿는 우리들조차도 성탄절을 기다리는 마음이 예전만큼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왜 그럴까요? 아마도 성탄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상업적으로 떠들썩하고 흥청거리는 분위기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탄절이, 성탄절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성탄절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성탄절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탄생하고 나서 아기 예수로 있을 때 부모들과 함께 성전을 방문한 기사입니다. 여기서 아기 예수와 예수님의 부모들은 시므온이란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시므온은 어떤 사람일까요?
1. 개인적인 믿음생활이 좋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분의 신앙에 대해서 “의롭고 경건하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오늘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종교생활이란 종교적인 위안과 만족을 위해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입니까? 자신의 위안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믿음생활을 말합니다. 의롭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바른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살기 위해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시므온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본문의 정황을 볼 때 살날이 많이 남지 않은 정말 나이가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롭고 경건한 믿음생활을 그 때까지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삶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믿음생활이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는 그 순간까지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간에 들쭉날쭉 하는 사람은 믿음이 깊이 있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으로 꾸준하게 그것도 평생을 유지하면 굉장히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어른들의 삶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존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에게 배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갖기 어려운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이 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영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분들 중에서 예를 든다면 먼저 고춘성 권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 오셔서 교회를 잘 섬기시다가 지금은 일산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그 때 연세가 70정도였는데 얼마나 지혜롭고, 깊은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젊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은 김근애 권사님이 계십니다. 권사님도 연세가 70이 넘었습니다. 기력은 비록 약하지만 권사님의 영성을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릅니다. 깊은 영적체험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존경하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믿음생활을 이렇게 해야 합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만나는 시므온이 그런 분이었습니다.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5절을 보면 성령이 그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늘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26절을 보면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27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믿음생활을 나이가 들도록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나이는 많고, 쇠약했지만 영적으로는 건강했고, 펄펄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나이가 들수록 영적인 나이도 깊어지길 바랍니다. 더 영적으로 깊어지길 바랍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면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앙생활이 되길 바랍니다.
2. 공통체적인 믿음이 좋았습니다.
시므온의 믿음생활 특징 중에 또 하나는 이렇게 개인적인 믿음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믿음도 좋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해야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과 이런 개인적인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개인적인 믿음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그 믿음은 다른 차원으로 성장하는데 어떤 차원이냐 하면 공동체적인 믿음으로 성장해 간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야 하면 내 문제에만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이웃과 지역, 민족과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믿음으로 up grade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는 별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웃과 나라와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가 많아집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시므온이 그런 사람입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온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의롭고 경건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뜻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뜻은 뭘까요?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 자기 조국을 위로해 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예를 들어서, 돈이나, 명예나, 사람의 말로) 위로가 안 되고 하나님이 위로해 주셔서 위로가 되는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사사로운 자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을 위로해 주세요!>
왜 그런 마음을 가졌을까요? 민족적인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삶의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경제적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앞을 보아도, 좋아지고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와 세계경제가 그렇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어둠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예측이 안 됩니다. 이제 시작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더 갈지 두렵습니다. 기도해야할 때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때인 줄 믿습니다.
< 하나님! 우리 조국을 위로해 주세요. 국민들은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기업이 무너지고 있고, 가장들이 직장에서 내 쫒기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할 데가 없습니다. 경제는 흔들리는데 정치는 쉴 사이 없이 싸움질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더 폐쇄적으로 가고 있고, 북한의 동포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온통 아픔과 상처뿐인 이 민족을 하나님, 위로해 주세요. > 기도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에만 매여 있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민족)을 위해서 남다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시므온의 기도와 소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조국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옵소서!”
3. 하나님의 위로
그런데 여러분! 시므온이 기도하는 <이 민족을 위로해 달라>는 기도 속에서 과연 그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위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조국 이스라엘을 향한 어떤 위로를 원하고 있을까요? 그 위로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메시야의 탄생”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어서 오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해답이라는 겁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독특한 사상이 있는데 바로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모든 억압과 절망과 죄에서 구원해 줄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가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있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시므온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믿음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조국을 생각할 때 너무 암울하고 절망적이었기 때문에 약속하신 메시야가 지금 오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셔서 자기 민족을 위로해주시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이 사람은 눈을 감을 수 없었습니다(*27-29).
그런 그가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야를 만났을 때 비로소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겁니다. 왜 일까요? 그분의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30절). 그분이 이스라엘을 뿐만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온 세계를 비추는 빛이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31-32).
여러분!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그분이 개인의 소망, 민족의 소망, 세계의 소망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야 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를 위로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2000년 전에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결 론 >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이미 이 땅에 오셨는데 왜 이 땅에는 위로가 없을까요? 세상은 왜 아프고 상처 받고 고통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까요?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병든자, 죄인들, 가난한 자, 상처 받은 자를 위로하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제 우리에게 맡기시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로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을 해야 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조차도 세상 것으로 가득해서 위로의 주님을 모실 자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고, 주님의 입이 되어 세상의 위로자로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 마음조차도 그 주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을 앞두고 있는 이 때, 우리 마음에서부터 그분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분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안에 계신 그분과 함께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세상을 위로하는 일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 번 성탄에 이런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1) 성탄 선물을 한 가지씩 준비하자.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할 때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서 선물을 주면서 위로해 주자. 가족도 괜찮다. 교회 식구도 괜찮다. 이웃도 괜찮다. 위로가 필요하다가 생각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나누자.
2) 성탄헌금을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 마음이 아프고, 힘든 사람을 위해서 의미 있게 쓰도록 하자. 우리 교회부터 세상을 작은 부분에서부터 보듬고 위로하는 성탄이 되자.
3)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 상처 받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지도자를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자. 그래서 그분이 오신 뜻에 맞는 성탄이 되게 하자.
< 기도 >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위로하는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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