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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있는 믿음
임호남 2008-10-05 추천 0 댓글 0 조회 175

여백이 있는 믿음(히 11:13-16)


슈베르트의 교향곡 중에 미완성 교향곡이 있다. 보통 교향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2악장 밖에 없다. 그래서 미완성 교향곡이라 한다. 그렇지만 이 곡을 가지고 교향곡이 ‘잘못됐다.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 없다.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또 유명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야 꼭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람들은 꼭 금메달을 딴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메달을 따지 못하고 탈락했던 역도의 이배영 선수, 은메달을 땄던 펜싱의 남현희 선수...이런 선수들 때문에 우리는 오래 동안 감동의 기억들을 갖고 있다.


약간 아쉬운 듯이 살아가는 것도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하자.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탐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부족한대로 감사할 수 있고, 부족함 자체에 적응하면서 사는 자세가 아름답다.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해서 꼭 불행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부족함은 불행이 아니라 내가 더 온전해 지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부부관계가 그렇다. 부부는 완벽한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부족한 사람이 만나 서로 상대의 부족을 채워주는 것이다.


남편의 부족은 아내가 채워주고, 아내의 부족은 남편이 채워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다. 완벽한 두 사람이 만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더 갈등하고 부딪힐 수 있다.  삶은 자신의 부족을 인정할 때 더 온전해 진다.


신앙생활이 그렇다. 신앙생활은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데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부족으로 인해서 절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 부분은 하나님께 맡긴다. 하나님이 채우시도록 하나님께 내어드린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바울을 보자.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던 사람이다. 자신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빌 3:4)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때 그 약한 부분을 주님의 능력으로 보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약하고 부족한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더 온전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삶에 조금은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림도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다. 화폭에 욕심이 있어서 꽉꽉 채우면 내용은 많이 담을 수 있지만 그림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간다. 여백이 있어야 그 그림이 더 아름답다. 인생이 다 그렇다. 여백의 아름다움, 덜 채움의 아름다움을 배워야 한다.


음식을 죽기 살기로 먹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먹는 것도 여백을 남겨야 한다. 약간 아쉬운 듯이 먹는 것이 좋다. 위를 다 채우려고 하지 말고, 약간 비워두라. 가득 채워놓았는데 더 맛있는 것이 나오면 어떻게 하는가? 약간 비워두라.


하나님도 이런 여백의 아름다움을 알고 계신 분이시다. (레 19:9-12)

『[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추수할 때도 완전히 다 하지 말고 모퉁이를 남겨두라고 했다. 이삭까지 꼼꼼하게 다 거두지 말라고 했다. 남겨두라고 했다. 포도를 수확할 때도 조금 남겨두라고 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그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우리도 까치밥이라 해서 남겨두는 풍습이 있지 않는가?  어부들이 고기를 잡을 때도 싹쓸이 하지 않고 남겨두는 지혜를 발휘한다. 여백이 필요하다.


생활도 약간 모자란 듯이 하라. 그것이 다 채우고 가진 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감사도 그렇다. 다 가지면 감사가 나올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다 가지면 없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감사도 나오지 않는다. 약간 모자란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더 감사를 많이 한다.

 

믿음생활에도 이런 여백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만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다. 이들은 약간 아쉬움이 있는, 여백이 있는 삶을 살았다. 히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여백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했는가?


1.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믿음을 따라 죽었다(13).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다. 삶은 마무리가 중요하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마지막을 많이 본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죽는 마지막 순간의 믿음이 중요하다.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는 것이 귀하다.


그런데 이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어떤 믿음으로 살았나? 13절을 보자. 이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 정확히 표현을 하면 ‘하나님이 주마’ 하신 약속들이 있는데 그 약속을 실제로 받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하는 것을 다 받지 못했고, 다 이루지 못했는데도 믿음으로 살았고, 그 믿음을 죽는 순간까지 변치 않고 지켰다는 것이다. 참 믿음이다.


참 믿음이 있다면 잘못된 믿음도 있다. 거짓 믿음, 형식적 믿음과 더불어 잘못된 믿음의 형태 중에 하나가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이 뭔가? 말 그대로 복을 바라고 믿는 신앙이다. 신앙생활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믿는 것이다.


믿음생활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영육 간에 복을 받는다. 또 받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복만 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오로지 복만 위해서 믿는 것이 기복신앙이다.


이런 사람은 복을 많이 받으면 신앙생활을 계속하지만 잘 안 되면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다.  축복을 원하지만 희생과 섬김은 원치 않는다. 기복신앙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누구인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다. 신앙을 이용해서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기복신앙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믿고, 신뢰하고, 내가 충성하고 헌신해야할 대상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의 성공과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인가?

 

믿음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살아생전에 다 누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었다. 참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 축복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이 달랐다.


2.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면서 믿었다.

지금 당장 다 받지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포기하고 낯선 땅 가나안으로 갔다. 하나님이 그 땅을 그에게 주고, 그를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은 큰 민족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사는 동안에 이 약속을 받지 못했다. 약속한 가나안 땅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리라는 약속도 겨우 이삭 한 아들로 만족하면서 살아야 했다. 약속은 있지만 그 약속을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약속이 부도가 난 것인가? 아니다.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성취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 약속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성취되는 과정에서 작은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자기 때에 약속이 다 이뤄지지 않아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다. 이것이 진짜 신앙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이다. 관계의 핵심은 give & take가 아니다. 내가 얼마큼 주었기 때문에 나도 얼마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다. 거래에서는 무조건 주는 것만이 통하지 않는다. 내가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거래가 성립된다. 그러나 소중한 만남과 관계는 거래가 성립이 안 된다.


 부부를 예로 들어보자. 부부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내가 당신을 위해서 이만큼 희생했으니까 당신도 나를 위해서 이만큼 희생해야 돼! 혹은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안 해주니까 나도 당신에게 더 이상 못해 주겠어>

이렇게 나가면 그것은 부부관계가 아니라 거래관계다.  그 부부는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지 못한다. 늘 이해득실을 따진다. 그래서 늘 서로 피해의식이 있다. 손해 본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지 않는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고, 희생하고, 주는 일을 한다. 그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신뢰, 사랑, 이해, 희생이란 것들이 반드시 따라와야 한다. 그래야 깊은 인격적 관계가 성립된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당장 이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분의 계획, 사랑, 신실하심을 믿었다.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언젠가 이뤄질 것을 믿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다. 이것이 참 믿음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뤄지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 이것이 참 믿음이다. 현재 다 채워지지 않아도 언제가 이뤄질 것을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여유, 이것이 믿음이다.


3. 나그네로 살았다.

나그네의 특징이 있다.

첫째, 짐이 가볍다. 나그네는 절대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최소한의 물품만 가지고 다닌다.

둘째,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천국의 나그네다(시 90:10).

“우리의 수명은 칠십 년, 힘이 있으면 팔십 년이지만, 인생은 고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날아가듯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우리는 이 땅에 천 년, 만년 살지 않는다. 잠시 머문다. 그 짧은 세월 중에도 늘 고생과 슬픔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날아가는 것처럼 빨리 지나간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다. 특별히 예수를 믿으면 진짜 나그네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살 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천국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는 정거장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이상하게 이 세상의 생활이 낯설고 어색하다.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나그네요 외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면 여유가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 세상이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살 곳이라면 그 때부터는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부지런히 모아야 하고, 땅도 사야하고, 집도 사야하고 더 모아야한다.


그러나 나그네라면 굳이 그렇게 모으고 쌓을 필요가 없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국의 나그네들은 무위도식하고, 현실도피주의자들처럼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서 바쁘다. 그런데 다른 목적 때문에 바쁘다.


이 세상 것을 모으고 쌓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그 시간과 에너지를 천국 사업에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나그네의 삶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나느네 의식을 가지고 여유를 가지고 살았다. 현실에서 원하는 것이 다 이뤄지지 않아도 너무 조급하지 않았다. 여유가 있었다.


믿음에는 이런 여유와 여백이 꼭 필요하다. 그 여유와 여백이 있을 때 우리는 느긋할 수 있고, 보다 감사할 수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힘쓸 수 있다.


여러분의 삶에는 여백이 있는가? 하나님 때문에, 영원한 천국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으면 늘 이 세상 것에 집착해서 쫒기 듯이 살아가는가? 바라기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여유와 여백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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