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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된 금식의 원리
임호남 2006-11-12 추천 0 댓글 0 조회 133
 

참 된 금식의 원리(마태 6:16-18) 06큰뜻주일낮


예수님께서는 참 된 신앙이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실례들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구제였습니다. 둘째는 기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금식입니다. 금식이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이 단식과 다른 것은 단식은 정치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금식은 기도를 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단식과 다릅니다.


과거 우리나라 독재정치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들이 독재정권에 대항해서 단식이란 방법으로 일종의 저항을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밥을 안 먹는 다는 말은 목숨을 내 놓는다는 뜻입니다. 굉장히 강력한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체중을 빼기 위해서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단식을 하기도 합니다. 단식도 금식도 아닌 굼식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냥 먹기 싫어서 안 먹는 겁니다.  그러나 금식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고 권리인 음식을 먹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금식을 한 번 해 보십시요. 3일 정도만 해 보십시요.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위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까요? 첫째,<굶으면 배고프구나>하는 진리입니다. 여러분! 굶으면 정말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끼니를 굶어보면 먹는 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압니다.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 것을 압니다.


둘째,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집니다.

사람은 하루 세끼 먹기 위해서 준비하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먹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먹고 나서 소화시키는데 시간을 투자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루 세끼를 먹지 않고 보내 보십시요. 하루가 왜 그렇게 긴지 모릅니다. 먹는데 준비하는 시간, 먹는 시간, 먹고 나서 쉬는 시간, 혹은 무엇을 먹을까 신경을 쓰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지면 하루가 길게 느껴집니다.


셋째, 얼마나 우리가 욕망에 매여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욕망 덩어리입니다. 좀 더 잘 먹고, 좀 더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감사를 모릅니다. 그런데 가장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포기해 버리면 사람이 갑자기 경건해 집니다. 육체의 욕구와 욕망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닌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있다는 것을 그 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금식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금식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1. 성경에 언급된 금식의 예

1) 국가적인 위기가 왔을 때 금식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대하 20:3에는 모압과 암몬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왕이었던 여호사밧이 금식을 선포합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금식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결사적으로 매달렸다는 겁니다. 금식기도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인간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 결사적으로 매 달리겠다는 표현입니다. 음식을 포기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기도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금식기도를 하면 하늘에서는 비상이 선포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금식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기도할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성도들의 기도에 관심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만큼 금식기도는 능력이 있고 기도 응답이 빠르다는 뜻입니다.  한국교회도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금식을 선포하고 온 민족교회가 기도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 바로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2) 자신을 위한 금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끊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해도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 때는 금식을 해 보세요. 끊어집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까? 금식기도 해보세요. 부부사이에 위기가 왔습니까? 금식하면서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금식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선교사를 파송할 때 전교회가 금식기도하고 나서 파송을 합니다. 많은 경우 개인과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시고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앞두고는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처럼 금식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잘못된 금식도 있습니다.


2. 잘못된 금식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금식을 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금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앞에서 보았듯이 신앙생활도 아주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금식의 목적은 앞에서 살펴본 그런 경건하고 영적인 동기에서의 금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금식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이렇게 경건하게 산다는 것을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면 그런 금식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고 했던 겁니다.  이 말씀처럼 이 사람들은 금식할 때면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를 내었습니다. 얼굴을 찌푸린다든지 화장을 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모습을 통해서 힘들게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대단하다 경건하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 저도 목회를 하다보면 주변의 친구 목사님들이 금식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 있어서 식사를 하거나 음료를 먹을 일이 있을 때 먹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왜 안 드세요? 물어볼 때 <금식중입니다>그러면 괜히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요? 저는 금식을 잘 못하거든요! 금식이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데 수시로 금식하는 걸 보면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그런 칭찬과 존경을 즐겼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니들은 명함에도 40일 금식기도 몇 회라는 내용을 기록해서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금식하지 말라했습니다. 17절을 보면 금식할 때는 도리어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고 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밥을 굶어가면서까지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기 위해서인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금식의 기본적인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금식은 하면서도 남들이 하는지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금식할 때 더 밝게 보이기 더 예쁘게 꾸며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표를 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굉장한 영적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금식뿐이겠습니까? 모든 신앙적인 행위들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인정해 주던 인정해 주지 않던 관계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갈 수 있다면 영적으로 굉장히 자라가 될 겁니다.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참 된 경건생활입니다.


3. 오늘날 금식의 필요성

  이상에서 우리는 성경에 언급된 올바른 금식과 잘못된 금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금식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금식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물론 과거처럼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일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금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1)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서

우리 시대의 특징은 풍요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고마움을 모릅니다. 내가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잘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를 곪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수 억 명입니다. 믿기지 못할 일입니다만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풍요롭게 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돕는 단체에서 일년에 한번씩 금식하는 기간을 정해서 함께 동참함으로 굶주림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느껴보는 기아체험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굶은 밥값으로 그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욕망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욕망을 이루면 더 큰 욕망을 가집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으로, 이웃을 돌볼 주도 모르고 앞만 향해서 자신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 욕망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금식은 이런 욕망을 통제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씩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갑자기 많은 금식이 아니라 한 끼 금식 같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주일간 하루에 한 끼를 포기하면서 생활해 보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한 끼를 금식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남는 시간에 좀 더 많은 기도시간을 가지고, 성경을 묵상하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2)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빨리 빨리입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세계는 급속도로 발전해 왔고 더 빨리 발전하기 위해서 서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업들도 경쟁사보다 더빨리 신제품, 더 앞선 제품을 내 놓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이 빨리라는 사회분위기를 대변해 주는 음식이 맥도날드로 대변되는 패스트 푸드입니다. 쉽게, 간단하게 먹어버리고 계속해서 일에 매달리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성장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것도 많지만 사실은 잃은 것도 많습니다.  삶의 여유를 잃었습니다. 자기를 성찰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삭막해졌습니다. 너무 빠르게 사느라고 소중한 가족을 잃었습니다. 자녀들과 보낼 시간이 없고, 부모님에게 안부를 물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급하게 삽니다.


그런데 이런 패스트 푸드에 대항해서 새롭게 떠오르는 운동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데 슬로우 푸드라는 운동입니다. 즉흥적이 음식대신에 고유한 음식, 우리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삶의 여유를 찾아보자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슬로우 푸드 운동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슬로우 푸드 운동처럼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금식이 필요합니다. 금식할 때 우리는 삶의 여유를 가집니다. 금식하면 모든 것이 느려집니다.


첫째 걸음걸이가 느려집니다. 둘째, 삶의 속도가 느려집니다. 여유가 생기고 묵상이 생깁니다. 자신을 돌아보는데 금식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영혼은 황폐화되고 있는데 돌볼 틈도 없이 세상의 야망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이지 모릅니다. 이런 우리들이 금식을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볼 수 있다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금식은 잘못된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고치게 해 줍니다.

금식은 잘못된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게 만들어 줍니다.

금식은 민족과 개인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줍니다.

올바른 금식을 통해서 나쁜 것은 끊어버리고 바른 것은 행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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