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믿는 믿음(시편 13:1-6) 17특새(1-2)
<잠>이란 우리 삶에 정말 필요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적어도 잠자는 시간만큼은 세상 모든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고 안식하는 시간입니다. 잠을 잘 자고 나면 얼마나 깨운 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리 좋은 구경을 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잘 쉰다고 해도 수면이 주는 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달콤한 수면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한 보약입니다. 그래서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사망의 잠이 있다고 합니다(3).
(시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사망의 잠은 죽음의 잠입니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아주 위험한 잠입니다. 그래서 이 잠은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 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1) 어떤 것이 사망의 잠일까요?
겨울에 산에서 조난을 당하면 죽는 가장 큰 원인이 뭘까요? 겨울에 산 속에서 추위와 싸우다 보면 저체온증이 오게 되고, 동시에 잠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잠을 자 버리면, 그 사람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겨울 산속에서의 조난당한 가운데 찾아오는 잠은 달콤한 안식의 잠이 아니라 사망의 잠입니다. 이 잠은 정말 죽기 살기로 해서 이겨내어야 합니다. 자는 순간 그 사람은 죽는 겁니다.
운전을 할 때도 사망의 잠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잠을 이겨보려고 해도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허벅지를 꼬집어도 밀려오는 잠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에 빠지게 되면, 그 잠은 결국은 사망으로 가는 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운전 중에는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합니다.
2. 영적으로도 사망의 잠이 있습니다.
무엇이 사망의 잠입니까? 본문의 문맥을 보면,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호소합니다(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이 자신을 영원히 잊으신 것 같다고 느낍니다(1절). 주님이 자신에게서 얼굴을 숨겼다고 느낍니다(1절). 무슨 말일까요?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겁니다.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일부러 숨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은혜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집니다. 그 결과 이렇게 됩니다(2절).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자신의 영혼은 번민에 빠집니다.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있습니다.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고, 희망이 없습니다. 원수들은 그런 자기를 치면서 좋아합니다. 양사방으로 고난을 당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때, 그 사람의 영혼은 <사망의 잠>에 빠질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1) 결국 <사망의 잠>이란 뭘까요?
영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채, 계속되는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찾아오는 영적침체를 의미합니다.
이런 영적침체에 빠질 때, 나타나는 현상은 신앙생활에 활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설렘이 줄어듭니다. 습관적으로 하게 됩니다. 관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나의 이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지 않은가?> 이런 회의를 합니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현상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지 않나? 왜 침묵하시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나?> 이런 회의가 찾아옵니다.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분노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영적인 사망의 잠을 불러옵니다.
3) 제가 생각할 때, 이 시대의 적지 않은 크리스천이 사망의 잠의 경계선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생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벽은 너무 커 보입니다. 그 벽 앞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자기 자신은 너무나 작아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그냥 세상에 몸을 맡기고 그냥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칫 사망의 잠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사망의 잠을 자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2. 다윗은 어떻게 이 사망의 잠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1)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언제까지 나를 이렇게 버려두시느냐>고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질문하고, 때로는 따집니다.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이런 고민, 탄식, 고통이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반증입니다.
일단 잠에 빠져버리면 이런 고통이 없습니다.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은 너무나 달콤합니다. 나아가 편안합니다. 그런데 그 달콤함과 편안함이 결국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운전 중에 졸음이 몰려오면 단 1초만이라도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강렬한 유혹이 밀려옵니다. 그 순간이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입니다. 타협을 하고 눈을 감아버리면 결국 죽음으로 가는 겁니다. 싸워야 합니다.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하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2) 다윗이 사망의 잠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했다고 했습니다.
(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 주의 사랑을 영어로 보면
다윗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포기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나를 포기할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내 믿음이 약해져서 확신을 가지기 어렵지만, 적어도 하나님은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을 분이라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잠에 문턱에 와 있지만 그래도 다윗은 5절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합니다(5). 반드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줄 줄 믿고 있습니다.
(시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이 사망의 잠에 경계선에 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한계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금만 더 기다립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계속해서 싸웁시다. 불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을 꼭 가지시길 바랍니다.
< 기도 >
영적인 죽음의 잠을 이기게 하소서. 불변의 사랑을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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